수필, 계곡에서 벗어나자
-《장백산》에 실린 몇편의 수필을 모티브로
수필이란 일정한 형식을 따르지 아니하고 일상적인 느낌이나 체험을 생각나는 대로 자유롭게 쓰는 산문형식의 문학이다.
그렇다면 산문이란 운률이나 음절수 등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쓰는 글이다. 즉 환언하면 운률을 갖춘 시나 특정구조를 갖춘 희곡 등을 제외하고 소설까지 포함해서 모두 산문이라는 것이다. 풀어서 쓰는 글이라고 보면 되겠다.
이런 예비지식을 가지고 우리는 우리의 요즘 문학지에 실리는 우리들의 수필을 다시 훑어보기로 하자. 다만 편집부의 부탁을 받았으므로 오늘은 일단 《장백산》잡지에 지난해와 금년에 실린 수필 작품 몇편을 모티브로 수필에 대해 다시 두런거려보기로 한다. 특히 요즘 독자들의 반응도 좋고 또 열심히 글을 쓰는 ‘80’후의 수필들만 별도로 모아보았음을 고백한다.
1.수필, 너무 서사화에만 골몰하는 문제
요즘 우리의 수필들을 보면 이야기에만 너무 집중을 한다. 심지어 감동이야기가 곧 수필이라는 말도 안되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 독자들을 감동시켜야 하오, 독자들을 감동시키려면 먼저 편집들부터 감동시켜야 하오, 라는 말들이 어제오늘 갑자기 들려온 것은 아니리라.
이야기를 써야 한다. 수필에 서사수필이라는 것이 들어있으므로 이야기를 쓰는 것은 아주 당연지사이다. 그런데 수필에는 서정수필과 정론수필이라는 것도 들어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요즘의 수필들을 보면 감동이야기가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 짤막한 이야기는 콩트에 지나지 않을 가능성이 많다. 그것을 수필로 승화시키려면 그 이야기에서 받은 작자의 주장 또는 느낌 내지 감수가 들어가주어야 하는 것이다.
최소연의 수필들을 보자. 〈눈물 휴계소를 지나며(외2편)〉이라는 제명의 수필 3편이 있다. 우선 〈눈물 휴계소를 지나며〉를 보면 이야기에 집중한 것이 아니라 자기만의 감수가 잘 드러나고 있다. 이 수필에도 이야기는 있다. 그러나 그 이야기는 최소연이 이 수필에서 독자들한테 말하고저 하는 메시지를 위한 사실적 근거 정도로 작용하고 있다. 말하자면 이야기를 위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살아가는데 가끔씩은 ‘눈물의 휴계소’가 필요하다는 말을 하기 위해 노래방 이야기를 털어놓은 셈이다. 이것이 수필의 기본이다.
그녀의 다른 수필들인 〈노을에서 나를 읽다〉도 그렇고 〈비우고 버무리는 재미〉도 그렇고 어디까지나 수필에 동원된 이야기들은 수필에서 작자가 독자들에게 안겨줄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소품인 것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런 이야기들이 감동이야기라고 할지라도 그 감동 자체가 수필의 목적인 것은 아니다.
단순한 이야기만으로는 콩트에 속할 가능성이 다분하다. 그렇다면 콩트란 무엇인가?
콩트란 인생에 대한 유머, 기지, 풍자가 들어있는 가벼운 내용의 아주 짧은 이야기이다. 그러므로 콩트는 소설에 가깝다. 엽편소설과 콩트의 차이라면 둘 다 짧은 분량임에도 기승전결을 제대로 갖추는 게 엽편소설이고 콩트는 오히려 극적반전을 중시하는 구조라는 것이다. 콩트에 속하는 우스개 하나를 하면 “일출 보러 가야 하는데 해 뜨기 전에 가면 너무 추우니 우리 해 뜬 다음 가자.”이다. 콩트는 이렇다. 정곡을 찌른다. 일침견혈인 것이다. 물론 수필도 이렇게 쓸 수 있으나 수필을 꼭 이렇게만 써야 한다는 규제는 없는 것이다. 그것은 수필의 다양성문제이다.
2.수필, 너무 단조로운 문제
이야기에만 집중하기에 수필이 매우 단조롭고 무미건조할 때가 많게 된다.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이 있을 때 수필을 써야지 어떤 이야기에 감동을 받아서 그 이야기의 감동을 전하기 위해서만 수필을 쓰면 수필이 단조로울 수 밖에 없다.
그런 면에서 리은실의 수필 〈그럼에도 불구하고〉는 썩 좋은 보기가 되고 있다.
리은실은 수필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이색적인 제목을 달아놓고는 거두절미하고 “‘그래서’보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어감을 좋아한다.”라고 자기의 주장으로 수필 첫머리를 장식하고 있다. “나는 어느 날 옷장을 뒤지다가 엄마의 치마저고리를 발견했소.”라는 식으로 시작된 수필보다 얼마나 신선한 서두인가.
이 수필은 시종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정면에 세워두고 자기 주장의 정당성을 보여주기 위해 그에 해당되는 이런저런 동서고금의 이야기들을 불러와서 글을 펼치고 있다. 그 이야기들을 읽어내려가노라면 우리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주억거리게 되고 그렇지 그렇구 말구 하며 저자의 이야기에 수긍하게 된다. 설득당하게 되는 것이다. 수필의 매력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특히 이 수필은 단순히 이야기(사실적 근거)만 동원한 것이 아니라 어느 책에서 본 이야기도 쓰고 있으며 영화의 한 장면도 떠올리는가 하면 자신이 전에 썼던 글의 한단락을 인용하기도 한다. 그런 이야기들은 이야기를 위한 이야기가 절대 아니며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설명하기 위한 소품으로 동원된 것들이다.
저자가 알심들여 선정해서 잘 짜놓은 풀롯을 따라 글을 읽어내려가다 보면 우리는 어느새 저자의 메타포를 읽어내게 되며 그래서 그런 것이였구나 하고 감탄을 하게 되는 것이다.
추억이 곧 수필이라는 도식에서 벗어날 때가 된 것이다. 추억을 쓰되 그 추억은 저자의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수단이 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추억 또는 이야기는 그냥 추억 또는 이야기에 그칠 소지가 다분해진다.
여기에 한가지 곁들인다면 편집들의 문제도 존재한다는 것이다. 전에 흑룡강신문사 문예편집 채복숙선생이 필자한테 서정수필을 써줄 수 없는가고 물어온 적이 있다. 대뜸 써주었다. 그게 산문시에 가까운 서정수필인 〈비가 오네〉이다. 편집들은 투고해온 원고에만 집중하지 말고 더러 작가들한테 어떤 수필을 써달라고 부탁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보내온 원고만 보고 그것을 편집해서 발표를 하다 보면 수필을 쓰는 사람들조차 ‘아, 편집부에서 이런 원고를 좋아하는구나.’ 하고 자꾸 서사화된 수필만 쓰게 되는 것이다. 악순환이 계속된다는 얘기이다.
3.수필, 너무 쉽게 쓰는 문제
요즘 다들 수필을 너무 쉽게 쓰는 듯한 느낌을 털어버릴 수 없다. 진짜 문인들은 수필쓰기가 참 어렵다고 다들 도리머리를 흔든다.
우리는 술상에 마주앉으면 대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일반인들의 취중진담을 들어보아도 재미있다. 서두도 있고 결말도 있고 본문에 유머나 위트까지 섞여있어 술안주로 제격이다. 그대로 써도 수필의 한대목이 얼마든지 되여줄 수 있다.
그런데 왜 발표되는 수필들은 재미없고 식상한 이야기만 고장난 레코드처럼 되풀이하는 걸가? 얼추 서두만 보아도 비슷한 이야기들이 란무한다는 말이다.
추억을 썼는데 그 추억이 한편의 멋진 수필로 된 경우도 있다. 림연춘의 〈자전거가 그리운 시간〉이란 수필이 바로 그러하다.
이 수필은 진짜 추억을 쓰고 있다. 네댓살 때의 이야기도 있고 학창시절의 이야기도 있으며 중학교 때 이야기에 직장 다니면서의 이야기까지 몇가지 이야기를 렬거하고 있다. 그런데 왜 지루하지 않을가? 그것은 저자가 자전거라는 매개물을 가지고 모든 이야기를 관통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동원된 많은 이야기들에는 모두 저자 자신만의 감수가 녹아있다. 마치 로련한 롱구선수가 시합에 앞서 롱구화 신끈을 고쳐매는 것처럼 하나하나 힘주어 당겨주며 신들메를 동이다가 맨 마지막에 가서 나비모양의 맵시를 내면서 롱구화 신끈을 묶어주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수필은 모름지기 이렇게 쓰지 않으면 안된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하나의 작은 이야기로 감동을 이끌어내서는 그 이야기가 끝나면 수필도 끝나버린다. 거기에서 저자의 주장 또는 느낌이나 감수는 말짱 려과되여버리고 만다. 외통길로만 가는 수필이라고나 할가.
수필을 너무 쉽게 생각하고 너무 쉽게 써버리는 데서 나타나는 시행착오인 것이다.
다시 한번 수필의 정의로부터 강조해보자면 수필은 어떤 사건이나 인물로부터 작자가 받아안은 느낌이나 감수를 써야 그게 수필인 것이다. 그런데 수필을 쉽게 생각하고 쉽게 쓰다 보니 그냥 어떤 이야기만 늘여놓고 자기의 감수를 제대로 적지 않아서 수필로 완성이 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것이다.
수필은 생각을 여러 갈래로 하되 그 모든 생각들이 하나의 주제에 모아질 때 비로소 멋진 수필로 탄생되는 것이다.
또 우리가 오로지 감동이야기에만 집중하다 보면 녀성화된 수필이 넘치는 반면 남성화된 수필이 쌀에 뉘보다도 적은 웃픈 현실을 마주할 수 밖에 없게 된다.
4.수필, 너무 녀성화한 문제
김령은 〈이 귀한 봄날이 간다〉라는 수필을 선보이고 있다. 이 수필은 처음에는 아이와 봄을 맞아 식수를 하는 이야기로 시작된다. 그러나 그 이야기에 머문 것이 아니라 드라마에서 본 봄의 이야기도 쓰고 아이의 교과서에 실린 〈봄을 찾다〉라는 과문 이야기도 쓰고 있다. 말하자면 어떤 이야기 하나에 안주하지 않고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동원해 자기가 전달하고저 하는 메시지를 강하게 밀어붙이고 있는 것이다.
저자는 “우리가 매일 머리를 파묻고 하는 일들이 정말 그렇게 중요한 것일가?”라는 수사학적 질문을 던지므로써 자연의 봄과 마음의 봄을 자연스럽게 련결 지으면서 인생의 봄이야말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며 우리가 더욱 백안시해서는 안되는 소중한 존재라는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는 것이다.
좋은 수필이다. 아이를 썼기에 아련한 감동도 있고 수필의 요소들을 잘 살펴서 썼기에 설득력도 강하다. 뭐니뭐니 해도 자기만의 감수와 느낌을 유감없이 피력했다는 점이 돋보인다.
김령수필가를 대상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념두에 두기 바란다. 우리의 요즘 수필을 살펴보면 녀성화된 수필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녀성 수필가가 많다는 말이 아니라 수필이 녀성화로 흐른다는 것이다.
물론 녀성이 쓴 수필이 많으므로 수필이 녀성화로 흐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리은실한테서 한마디 빌려와서 기어이 한마디 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너무 녀성화된 수필만 넘쳐나는 시대를 살고 있지 않나 싶다. 남성이 쓴 수필조차 녀성화되고 있다는 얘기이다.
말이 빗나갈지 모르나 시랑송에서 불거지는 문제 하나를 얘기해야겠다.
요즘 시랑송이 붐을 이루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동조해서 너도나도 시를 랑송하고 모멘트에 올리고 공식계정에 올리고 위챗방에 올리고 있다. 좋은 일이다. 다만 아쉬운 점이라면 시 내용이야 어떻든 모든 시랑송이 다 똑같은 어조, 똑같은 톤, 똑같은 휴지로 일관되고 있다는 것이다.
분명 시는 내용에 따라 또는 그 시의 절주에 따라 혹은 빠르게 혹은 천천히 혹은 다급하게 서로 변별되도록 랑송되여야 할 것이다. 그런데 천편일률로 랑송이 이루어지고 있다.
수필 얘기를 하다가 갑자기 시랑송 얘기를 꺼내는 까닭은 우리의 수필들도 녀성화된 수필만 너무 고집하지 않나 하는 우려 때문이다.
수필에 서사수필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서정수필과 정론수필도 있다고 이미 말했다. 그런데 서사수필만 고집하고 감동이야기만 고집하고 추억에만 몰두하고 있으니 싸구려 이야기에 싸구려 감동으로만 점철되고 있는 수필의 현주소가 안타까울 따름이다.
감동이야기에만 문학상을 주는 것도 한몫 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다르게 쓰면 수상범위에서 배제되니 다들 그렇게만 쓰고 있는 것이다.
정확한지는 모르겠지만 우리의 편집진들을 보면 《송화강》잡지의 리호원씨와 《료녕조선문보》의 김창영시인을 제외하면 거의 녀성편집 일색이다. 물론 그것이 수필의 녀성화를 촉구하고 있다는 얘기는 아니다. 편집이라면 자기의 구미에 맞지 않는 것이라도 글이 되면 편집을 해야 한다. 남성적인 수필이 기대된다.
이상 지난해와 금년 《장백산》잡지에 실린 ‘80’후 수필가들의 몇몇 수필들을 모티브로 수필에 대한 일가견을 수런거려보았다. ‘80’후는 원로작가들이나 ‘60’후, ‘70’후에 비해 아직 문필경력이 짧지만 ‘90’후, ‘00’후에 비하면 그래도 긴 셈이다. 대학시절부터 글에 흥취를 가지고 썼다고 가정하면 그들은 대개 10여년의 문필경력을 가지고 있다고 봐도 대과가 없을 것이다. 이쯤 되면 나름대로 글에 대한 자신만의 소견이 있을 것이고 자신만의 스찔도 형성되였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80’후들의 글을 들여다보는 것은 우리 중국조선족 문단의 미래를 점쳐보는 일이 될 것이며 이제 그들의 어깨에 조선족문학이라는 짐을 올려줄 준비를 해야 할 것이다.
다만 오늘의 졸고는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임을 고백하면서 우리 수필이 좀더 다양하고 좀더 예술화된 즉 문학적인 수필이 많아졌으면 하는 바램을 두런거려본 것이다.
갓 지난 10월 8일은 절기로 백로였다. 백로는 흰 이슬이란 뜻으로 기온이 이슬점 이하로 떨어져 풀잎들에 이슬이 맺히는 절기라고 한다. 한로는 흰 이슬이 이제 차가운 이슬로 되였다는 뜻으로 아침저녁 기온차가 현저하게 커졌음을 나타낸다. 겨울이 저만치 다가왔다는 의미로도 풀이된다. 백로 다음 절기가 상강이다. 그건 서리가 내린다는 뜻이다. 서리부터는 기온이 빙점 이하로 떨어졌음을 의미한다. 즉 령상이냐 령하이냐 하는 그 꼭지점을 넘어서는 단계인 셈이다.
계절은 점점 추워지고 있으나 문학은 항상 봄날이였으면 하는 바램은 문학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의 소원일 것이다. 그런 문학의 봄을 항상 안고 살고 싶다.
[책임편집:홍려, 리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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