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래밥
홍길남 / 수필
20세기 70년대초 내가 소학교를 다닐 때였다. 그 때 나는 겨울방학만 되면 조양천 외할머니네 집에 놀러 가군 했는데 갈 때마다 외할머니가 해주는 소래밥을 먹었다. 특히 채칼로 친 무우를 넣어 지은 소래밥은 그 맛이 별맛이였다. 다만 가마치(누룽지)가 붙지 않는 것이 유감이였다.
“할머니, 가마치가 먹고 싶은데요.”
어느 날 나는 참다 못해 말을 꺼냈다.
외할머니는 응답 대신 바가지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이윽고 바깥 삽작문이 “삐꺽-” 하고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외할머니가 바가지에 옥수수떡을 몇개 담아가지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 이웃집에서 가져온 옥수수떡이라면서 먹고 싶으면 떡에 붙은 가마치를 떼여서 먹어보라는 것이였다. 나는 싫은 대로 옥수수가마치를 조금 떼여 입에 넣어보았다. 맛이 없었다. 그 맛은 평강벌에서 자주 먹어보던 바삭바삭한 입쌀가마치와는 전혀 비교도 안되였다.
“미안하구나, 쌀이 귀한 세월이여서…”
외할머니는 명상에 잠기는 듯하다가 “후-” 하고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엽초를 말아 피우기 시작하였다. 큰 가마에 가마치를 가득 붙여서 외손자한테 주지 못하는 것이 못내 안타까왔던 모양이다. 몰몰 피여오르는 담배연기는 잠간 새에 30평방메터도 되나 마나한 단칸방을 꽉 채웠다.
나는 외할머니의 말뜻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인구당 정량 배급을 타먹는 외할머니로서는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다. 쌀이 늘 모자라다 보니 친척집에 놀러 다닐 때도 자기가 먹을 쌀을 지니고 가지 않으면 안되는 세월이였으니 말이다.
그 해 방학에 외할머니네 집으로 놀러 갈 때 나는 입쌀 20여근이 든 쌀자루를 여린 어깨에 메고 려로에 올랐다. 뻐스 타고 기차 타고 삼봉동을 넘어 탈탈거리며 외할머니네 집에 당도했을 때 나는 온통 땀투성이가 되여 마치 물에 빠졌다 나온 햇병아리 같았다.
교교한 달빛이 유리창문으로 스며드는 어느 날 저녁, 외할머니는 나한테 20세기 30년대의 이야기를 불쑥 들려주었다.
나의 엄마는 ‘9.18’사변이 일어난 지 5년 만인 1936년에 화룡 시가지에서 태여났다. 동북이 일제한테 강점당하면서 서민들은 입에 풀칠하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생활이 궁핍해져 사람들은 부득불 류리걸식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외할머니네도 례외가 아니였다.
엄마가 태여난 지 석달이 다되는 어느 날, 봄철이라지만 맵짠 날씨가 지속되고 사나운 바람이 기승을 부렸다. 쌀이 없어 호박죽으로 대충 요기를 한 외할머니인지라 젖은 말라들 대로 말라들었고 엄마는 젖이 나오지 않는다고 발버둥치며 울어댔다.
이 광경을 가슴 아프게 바라보던 외할아버지는 삿자리를 편 구들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밖으로 씽하니 달려나갔다.
“어딜 가요? 이 밤중에.” 외할머니는 놀라서 물었다.
“쌀 좀 구해볼가 해서…”
외할아버지는 말끝을 맺기 바쁘게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렇게 집을 나간 외할아버지는 종무소식이였고 쌀은커녕 사람의 그림자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하늘이 무너지는 듯했지만 외할머니는 정신을 바짝 차렸다. 배고파 울고 있는 어린 딸애를 살리기 위해 외할머니는 이를 악물고 동네방네로 쌀 꾸러 다녔다…
(전문을 읽으시려면 아래 문자를 누르십시오.)
[책임편집:리혜]
扫描左侧二维码进入
《长白山》微商城
阅读更多精彩文学作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