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문학에서의 문화수필의 조용한 현신
2023·2024년 “장백산 특집”에는 10명의 작자(대학교수6명, 평론가와 소설가 5명)들이 창작한 “칼럼”이란 타이틀을 단 글 8편과 수필이라는 타이틀을 단 글 2편이 등재되였다. 이중 수필이란 타이틀을 단 글들은 별 문제가 없으나 “칼럼”이란 타이틀을 단 데는 거론해야 할 문제들이 있다.
영미문화권에서의 칼럼(column)이란 용어는 신문에서의 특별 기고, 또는 그 기고란 주로 시사·사회·풍속 따위에 대한 촌평寸评 란栏을 가리키는 말로서, 우리말로는 “기고란”· “시사평론”· “시평时评” 등이라고도 한다. 칼럼(column)의 어원은 원형기둥圆柱를 뜻하는 라틴어의 칼럼나(columna)이다. 이 칼럼나(columna)가 칼럼(column)으로 어음변화를 하면서 신문 지면에서의 종란纵栏을 가리키게 되였고, 다시 일정한 크기의 외곽선으로 정형화定型化한 기사의 란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게 되였다. 그리고 칼럼은 지식성, 취미성을 갖고있는 짤막한 글로서 전반 신문에서의 소스(sauce) 같은 존재로서 독자들의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기능을 갖고 있었다.
그리스 아테네 파르테논신전의 원형기둥
신문에서의 사설이 사론을 대표하고 정치·경제·사회에 속하는 중요 사항을 거론하기에 언제나 톱에 실리는것과는 대조적으로 칼럼도 때로는 정치·경제·사회 문제들을 다루기도 하지만 대부분 경우에는 통속성· 취미성을 가지고 있는 다소 가벼운 력사·문화·문학·예술·민속 등을 소재로 삼기에 흔히 신문의 제2,3면의 코너에 실리며 또한 필자가 자기의 주관적인 감상을 곁들여 서술하는 경우가 많기에 독자들에게 친근감을 줄 수 있다.
휴대용 컴퓨터 아이패드
이밖에도 매체의 변화 역시 언론매체들에서의 칼럼의 변화를 초래하게 되였다. 말하자면 지난 세기 60년대 이후 세계적으로 텔레비전이 급속하게 확산됨에 따라 텔레비전 등 전자매체가 종이매체인 신문이나 잡지를 제치고 정상에 올라서게 되였다. 이런 까닭에 신문, 잡지 등 종이매체에서의 칼럼 보다는 전자매체인 텔레비전에서의 연설·강연·토크쇼가 보다 각광을 받고있으며 신문지상을 리용하는 칼럼니스트들보다는 텔레비전 뉴스 프로에서의 뉴스 캐스터들이나 미크로블로그(MicroBlog) 같은 전자매체를 리용하여 많은 팬들을 확보한 유튜버(网红大V라고 함)들이 대단히 각광을 받고 있는 실정이다. 이를테면 요즘 장유위(张维伟, 1957~ )·사마남(司马南,1956~ )·금찬영(金灿荣, 1962~ )·진평(陈平,1944~ ) 같은 이들이 텔레비전이나 인터넷에서 각광을 받고 있음과 동시에 어마어마한 팬덤을 형성하고 있음과 동시에 커다란 사회적혼란도 야기시키고 있다.
2.2023, 2024년 “장백산 특집”에 실린 작품들의 편폭에 대한 소견
《장백산》 2023, 2024년에 등재된 10편의 “칼럼”은 주로 시사·사회·풍속 따위에 대해 평론했기에 우리가 흔히 말하는 칼럼의 소재 섭렵 범위와 별로 차이가 없으나 대부분 칼럼의 편폭을 말할 때 사용하는 “촌평寸评” 혹은 “단평短评”이라는 말로 표현하기에는 편폭이 다소 길거나 너무 길다.
이를테면 서영빈의〈자유와 륜리〉(4,120자)·최삼룡의 〈영상문화시대에 대비하는 우리의 자세〉(5,050자)·리은실의 〈MBTI와 ‘한사코’의 랑만〉(5,612자)는 칼럼으로 다소 길기는 하지만 그런대로 촌평이라는 칼럼의 자수 요구에 근접하지만 최창륵의 〈우리 시대의 독서〉(8,375자)· 조영욱의〈MZ세대와 인문교육〉(9,570자)·장학규의〈문학의 팬덤현상과 옳바른 우상관〉(9,707자)·박초란의 〈내권(内卷)과 탕평(躺平)〉(9,737)· 권혁률의 〈생태문학의 기원,개념,비전을 중심으로〉(13261자)·김관웅의 〈문화자신 만필〉(22,244자)는 촌평이라는 칼럼의 자수 요구와는 거리가 너무 멀다. 그러므로 이처럼 편폭이 긴 경우에는 “특집(혹은 특별기고)”이라고만 달고 “칼럼”이라는 타이틀을 달지 말았어야 했다.
남경에 있는 강남 공원(贡院,과거시험장)
이 글에서는 내권으로 인한 탕평이 가져다주는 후과에 대해 저자가 변증적으로 해석한 점에 대해서도 역시 공감했다. 앞에서 언급했던 송응성은 과거시험에서 다섯번이나 락방거자로 되여 벼슬길을 포기하고 탕평했으나 바로 이런 까닭에 《천공개물(天工开物)》같은 과학기술저작을 저술하여 중국 고대에는 지극히 희소했던 과학가로 될 수 있었으며, 포송령(蒲松龄,1640~1715)은 71세 때에야 겨우 공생贡生이 되면서 한 평생 내권을 지독하게 겪으면서 벼슬길에서는 탕평했지만 바로 그런 까닭에《료재지이聊斋志异》라는 불후의 문학명작을 세상에 남기지 않았던가. 우리는 《유림외사》에 나오는 과거급제통지서가 전달되는 날 쉰 살도 넘는 오랜 락방거자였던 범진范镇의 실태와 그 주변의 인물들의 갑자기 변화된 표정과 태도를 통해 전통시대에 있어서 과거시험이 얼마나 중요한 인생경쟁이였는가를 잘 알 수 있다.
아무튼 박초란의 이 글은 오늘날 중국사회에 존재하는 인간실존의 문제를 진실하게 드러내여 독자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아주 크고 많아서 사람의 마음을 계발해주는 좋은 글이라고 평가하고 싶다.
이 글은 철리성이 다분한 철학칼럼이라고 할 수 있다. 서영빈은 편집부로부터 〈자유와 륜리〉라는 이 제목을 받고는 “예전에 기획된 특집들을 보면 〈진짜와 가짜〉나〈시간과 공간〉처럼 대체적으로 반대되는 개념을 제시하는게 보편적이였다면 이번에는 왜 〈자유화 륜리〉라는 다소 억지스러운 조합을 제시했을가 하는 고민이였다”고 한다. 만일 〈자유와 륜리〉보다는 〈문학과 륜리〉였다면 서영빈이 아마도 이다지 고민하지 않았을수도 있었으리라.
정비석의 장편소설 《자유부인》
사실 서영빈의 이 글에서는 “자유와 륜리”의 관계보다는 문학에서의 표현의 자유와 륜리의 관계에 대하여 1954년에 《서울신문》에 련재된 정비석(郑飞石,1911~1991)의 장편소설 《자유부인》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작가와 서울대 법대 황산덕黄山德교수 사이에 “문학과 륜리도덕의 관계”를 쟁점으로 하여 벌였던 론쟁을 사례로 들면서 론술하였다. 문학창작의 자유와 륜리의 관계를 두고는 70년 전만 아니라 30여년 전인 30년 전인 1992년에도 장편소설 《즐거운 사라》의 작자인 연세대 국문과 교수 마광수(马光洙,1951~2006)에 대해 륜리적인 지탄을 넘어서 형법 제234조와 제235조의 음란물 금지법에 의해 감옥에 가두어 넣기까지 한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마침 그 이듬해 필자가 처음 한국방문을 했을 때까지 “마광수사건”의 여파가 사라지지 않고 있었는지라 지금도 그 기억이 생생하다.
아무튼 서영빈의 〈자유와 륜리〉는 다소 억지스러운 제목을 받고도 용하게도 글을 잘 지어낸 경우라고 할 수 있겠다.
권혁률의 이 글에서는 생태문학을 그 주제로 다루었다. 그런데 이 글은 그 제목부터 칼럼이나 문학작품의 제목답지 않고 마치도 《생태문학개론》 교과서 어느 장절의 소제목 같아서 독자들로 하여금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든다.
생태문학은 생태문학의 《성경》이라 일컬는 레이첼· 카슨(Rachel Carson, 1907~1964)의 《침묵의 봄》이 공식적으로 출판된 1962년으로부터 쳐도 이미 60년 이상의 세월이 흘렀기에 우리 독자들에게 생태문학을 계몽하는 형태의 이런 글은 너무 늦어진 감을 준다. 사실 우리 중국조선족문학사에도 생태문학리론을 수용하여 문학창작에 접목시키려는 시도는 이미 지난 세기 90년대 중반으로부터 김학송(1952~ )· 최룡관(1944~ ) 등 시인들에 의해 언녕 나타났으며, 또한 필자 역시 《중국조선족문학통사》(조문, 한문판)에서 이미 10여 년 전에 이미 이 두 시인의 생태시들을 분석, 평가한바 있다. 그런데도 이 글에서는 우리중국조선족문학사에서의 생태문학의 발생, 발전의 실태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제기하지 않은 점이 몹시 아쉽다. 우리의 기억을 환기시키기 위해 김학송의 생태시 두 수만 아래에 옮긴다.
모든 죽어있는것들이 달리고 있었다.
-〈예감의 새(5)〉(1994)
-〈사람이 그립다〉(1996)
이 글은 영상문화시대라는 이 환경 속에서의 우리 중국조선족문학의 대응을 다룬 문학칼럼이라고 할 수 있지만 다소 “행차 뒤에 나팔”이라는 감을 준다.
주지하다 싶이 영상시대의 선도자인 사진기가 1839년에 나타났으니 200년이 가까워 오고, 영상시대의 아이콘인 영화가 나타난지는 1895년이였으니 이미 백년 이상의 세월이 흘렀고, 텔레비전도 1925년에 나타났으니 역시 백년 세월이 흘렀고, 핸드폰은 1973년에 나타났으니 반세기 넘었고, 애플평판아이패드도 2008년에 나타났으니 20년 세월이 흘렀다. 그러므로 우리가 바로 영상시대를 살아가고 있은지도 퍼그나 세월이 흘렀는데도 “영상문화시대에 대비한다”는 이 언어적표현은 적절하다고 하기 어렵다.
물론 우리 중국은 구미의 발달국들보다는 아주 늦게 영상시대에 들어서기는 했지만 우리는 지금 영상시대는 대비해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는게 아니라 우리가 영상시대에 살아온 지도 이미 수십년 세월이 흘렀다. 필자가 모든 문서작업이나 자료검색을 컴퓨터로 해온 지도 이미 30년세월이 흘렀으니 말이다.
그리고 우리 중국조선족의 문학예술도 지난 세기 80년대부터 뉴밀리니엄 이후에 이르기까지 문학작품을 영상화하는 작업을 열심히 하여 왔다. 이를테면 중국조선족의 원로 극작가 최정연의 연극〈해토무렵〉을 영화로 제작한 〈첫 봄初春〉(1982년)을 필두로 하여 박희준朴熙俊,리흥국李兴国이 영화대본을 쓰고 장춘영화촬영소에서 제작한 예술영화 〈태양을 향하여向着太阳〉(1982) 그리고 조선족 영화인 장률(张律, 1962~ )의 〈망종〉(2005)·〈경계〉(2007)·〈두만강〉(2009) 등은 베를린영화제 같은 데서 수상하는 쾌거를 올리기도 했다. 필자는 《중국조선족문학통사》(하권) 조문, 한문판에서 개혁개방 후기 이후 중국조선족의 영화문학 및 장률의 영화에 대해비교적 자세하게 소개했다. 이 밖에도 개혁개방이후의 중국조선족의 TV드라마에 대해서도 비교적 상세히 소개했다. 영화 이외에도 우리 조선족문학인들은 문학작품을 텔레비죤드라마로 만드는 작업도 엄청 많이 하여 왔는데 그중에서 리광수李光洙, 허련순许连顺,김훈金勋, 리화숙李花淑 등이 많은 일들을 하여 왔다.
하지만 최근 년간은 중국조선족인구의 격감 등 여러가지 원인으로 이런 노력이 뜸해진 것이 몹시 아쉽다. 비록 이렇기는 하지만 이 글에서 최삼룡이 “아무튼 대부분 조선족 문인들은 영상문화에 대한 시대감각이 무딘 편이다”라고 한 평가는 우리 문학예술사에 대한 몰리해에서 오는 잘못된 평가라고 해야 할 것이다.
5)장학규의 〈문학의 팬덤현상과 옳바른 우상관〉
이 글은 완전한 문학칼럼이라고 할 수 있는 글이다. 주지하다 싶이 팬덤(Fandom)은 어떤 대상의 팬들이 모인 집단을 일컫는 말이다. 이 글에서는 영웅이나 스타에 대한 숭배자들은 예나 지금이나 이 세상에 존재하여 왔음을 많은 사례를 들어서 설명했는데, 퍼그나 설복력이 있다.
젊은 시절의 김학철 / 로년의 김학철 /
김학철의 대표작 《격정시대》
특히 중국조선족문학의 대부로 불리는 김학철옹의 찐팬인 필자는 이 글에서 필자를 포함한 우리 중국조선문단의 많은 김학철 팬들의 숭배심리에 대한 분석에 대해 심심한 동감을 표한다. 이미 작고한 우상렬선생이 국내외의 문학인들이 “중국조선족문학에는 우상이 있는가”라고 물어오면 자기는 “우리에겐 김학철이 있다”고 대답하겠다고 했던 말이 부지중 뇌리를 스친다.
노벨문학상 수상자 막언(莫言, 1956~ )의 사회비판성향의 문학이 사마남司马南 같은 왕훙따V나 모성화毛星火 같은 극좌파들에 의해 공개적으로 매도당하고 심지어 법에 기소당하기까지 하고 있는 중국 작금의 상황에서 우리 문단을 이리 훑어보고 저리 훑어보아도 사회비판의 예리한 칼날을 조금도 두려움이 없이 휘둘렀던 김학철 같은 문학계의 우상들이 그림자도 없이 싸그리 사라져버렸으니 참으로 마음이 허전하기 그지없다. 장학규의 이 글은 김학철옹이란 이 문학우상의 인간성과 작가정신에 대한 그리움과 그분의 비판성문학에 대한 향수를 다소나마 달래주어서 참으로 고마웠다.
다만 이 글에서의 “바람직한 추구 그리고 그 삶”이란 소제목을 단 이 부분은 구조적으로 보아 사족蛇足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7)조영욱의 〈MZ세대(00후)와 인문교육〉
19세기의 로씨야 작가 뚜르께네브(1818~1883)의 장편소설 《아버지와 아들》이나 중국의 현대작가 파금(巴金,1904~2005)의 장편소설《집》에서처럼 아버지와 아들, 부모와 자식 사이의 모순과 갈등으로 점철된 세대차는 언제, 어디서나 존재해왔다. 물론 사회나 문화의 격변기에 세대차는 보다 두드러지게 부각되곤 한다.
《아버지와 아들》 《집》
중국은 지난 백여년 동안 청나말기의 제정으로부터 신해혁명 이후의 공화정, 군벌분렬정, 국민당의 통치로부터 사회주의사회에로 넘어으면서 정치·문화·경제 및 사회제도 등 제반 분야에서 대격변기를 겪었다. 이를테면 필자와 비슷한 또래들은 대부분 서넛, 대여섯, 심지어 일여덟 형제가 함께 자라는 대가족제도하에서 자라났지만 우리의 자식들은 대부분 독신자녀 극상해야 형제자매가 둘을 초과하지 않는 핵가족 제도하에서 자라났으니 인간관계를 처리하거나 살아가는 생활방식 면에서 우리 기성세대들에 비해 다를수밖에 없다. 이 몇십년 동안 중국에서 일어난 변화가 어찌 이런 면에만 국한되는가.
앨빈· 토플러 앨빈·토플러의 《미래 쇼크》
미국의 미래학자 앨빈·토플러(Alvin Toffler,1928.10.8—2016.6.27)의 저서 《미래 쇼크》(1970년)이란 책에서 앞으로의 10년은 변화의 측면에서 과거 수백년, 수천년간과 맞먹어서 미래는 충격적인 변화의 시대라고 예언했었다. 바로 이 예언대로 요즈음 중국에서의 사회나 문화의 변화는 너무나도 급속하여 현기증을 일으킬 정도이다. 구미의 발달국에서 3, 400년 동안 거쳐왔던 제1차산업혁명(기계시대, 1760~1850)→제2차산업혁명(전기시대, 1880~1920 )→제3차산업혁명(디지털시대, 1950~2000),제4차산업혁명(지능시대, 2000~ )을 3,40년 동안에 후다닥 거쳐왔으므로 오늘날 중국에서의 세대차는 그 어느 나라보다 심각할수밖에 없다. 필자는 약 반세기 동안 중국이 전형적인 농업국으로부터 미국·영국· 독일· 일본 등 발달국로부터 “세계공장”의 자리를 빼앗아 제2경제실체로 되여가는 변화를 겪어왔기에 그로부터 나타나는 현격한 세대차에 대한 감회가 누구보다 심각하다.
이처럼 너무 나도 빠른 시대의 발전 템포에 적응하지 못한 우리 기성세대들은 우리 자식세대들에 비해 형 편없는 약세군체가 되였다. 필자만 보아도 휴대폰, 컴퓨터 등등 면에서 이제 겨우 컴맹을 면했기에 기차표를 끊으려고해도 자직들의 도움을 받아야만 하는 시대의 락오자가 된 것만은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 기성세대중의 많은 분들은 윤윤진교수가 수필 〈사회진보와 여유론운 로년생활〉에서 언급했다 싶이 “공·농·상·학·병·정·당(工·农·商·学兵·政·党)”를 두루 다 섭렵하면서 어느 세대보다도 넓고 깊고 어려운 인생수업을 하면서 인간과 사회에 대한 보다 풍부한 경험과 지혜를 쌓게 되였다. 이러한 기성세대에 비하면 MZ세대는 확실히 여러가지 도경이나 수단을 통한 인성人性수련이 절실히 필요하다. 사람은 재능도 중요하지만 덕성이 선행되여 그 무슨 가家가 되기 전에 먼저 사람이 되여야 한다.
물론 필자는 이 글의 저자 조영욱선생이 MZ세대에게는 필수적이라고 강조하면서 제기한 “인문학교육과 독서”는 인성수련에 필요한 여러가지 도경이나 수단중의 한 두어가지에 불과할 따름이라고 생각한다.
윤윤진의 이 수필은 로인들의 로년생화를 소재로 한 사회수필이다. 이 글은 저자 자신의 절실한 체험과 깊이 있는 사색을 곁들여 쓴 수필로서 다 같이 늙어가는 비슷한 신세이다 보니 필자의 마음에 보다 포근히 안겨온다. 특히 발달국 오스트랄리아를 둘러보고 그 나라 로인들의 여유로운 로년생활에 대한 가감없는 진실한 스케치와 이를 보고 내던진 “참 부러웠다. 저게 인간의 참 모습, 참 생활이여야 하지 않을가? 삶의 여유가 바로 행복이 아닐가?”라는 이 찬사가 필자의 마음을 끌었다. 윤윤진의 이 글을 읽으며 수필의 생명은 진실성에 있다는 말을 다시 한번 실감했다. 그리고 건강을 론하는 부분에서도 나는 커다란 공명을 일으켰다.
“건강하게 행복을 누리면서 말하자면 무병장수하고 삶의 여유를 누리면서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리상이다. 아침저녁으로 골골하면서 자식에게 페를 끼치면서 오래 사는 것보다 건강하게 가는 날까지 살아가는 것이 우리가 바라는 행복이다. 물론 부부동반이면 금상첨화다.”
다만 여기에 한마디만 보충하고 싶은 것은 “로후에는 혼자서 잘 노는 법도 익혀두어야 한다”는 한마디 뿐이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로 부부들이 손잡고 나란히 저 세상으로 가는 사례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확률이 아주 낮기 때문이다.
리은실의 〈MBTI와 ‘한사코’의 랑만〉은 심리학과 인간의 성격류형을 테마로 한 수필로서 모든 학문중에서도 제일로 심오하다는 심리학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글이다.
이 작품은 크게 세개 부분으로 이루어졌는데, 첫 부분에서는 “운세·혈액형·별자리”와 인간의 성격 사이의 련관성을 간단히 다루었다. 이중에서 운세나 성격을 알려준다는 동양의 점술이나 서양의 별자리를 가지고 인간의 운세나 성격류형을 알려준다는 점성술은 전근대의 비과학적인 미신의 범주에 들어가고, 그리고 혈액형과 성격류형 사이의 련관성 역시 별로 과학적이지 못하다는 생각을 떨칠수 없다. 혈액형은 선천적인 유전에 의해 생긴것인데, 혈액형이 인간의 성격류형을 결정한다는 주장은 성격은 생물학적인 유전에 의해 결정된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과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사람의 성격은 애오라지 30%~40%만 생물학적인 유전과 련관되고 60%~70%는 후천적인 학습, 단련, 환경의 영향과 관련된다고 한다. 이 부분에서의 이에 대한 서술과 분석과 일정한 설득력이 있다.
이 작품의 두번째 부분은 MBTI에 대한 서술이다. 우리말에 “한 부모에게 난 자식도 오롱이 조롱이”라는 속담이 있듯이 사람들의 성격은 각양각색이고 따라서 인간의 성격을 연구하는 심리학에는 오래전부터 사람들의 부동한 성격을 류형으로 분류하고 그 구조와 특징을 연구하여 왔는데, MBTI가 바로 그 결실이라고 한다. 그런데 리은실의 이 글은 성격류형 연구보고서가 아닌 데 그 구체적인 성격류형 및 그 특징을 소개하는데 거의 3분의 1이상의 편폭을 할애한게 다소 유감이다.
스위스 심리학자 카를·융의 《심리류형학》
세번째 부분은 MBTI에 대한 가치판단이다. 이 부분에서 작자는 중국 당대 소설가 왕삭(王朔,1958~ )의 소설 《중독된 사랑》에 등장하는 부동한 성격을 가진 두 남녀가 우여곡절 끝에 깊은 사랑을 하게 되는 사례를 들어 “인간을 성격에 따라 분류하고 그 분류에 따른 매칭을 하는 작업은 얼마나 부질없는 일인가”라고 하면서 MBTI에 대해 부정한다.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것은 왕삭의 소설 《중독된 사랑》에서의 남녀간의 한사코 사랑의 사례 하나만 들어 MBTI를 전반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다소 론리가 맞지 않는 섯부른 발상이라는 점이다. 물론 인간의 성격을 파악하는 것은 물리나 화학 실험처럼 정량(定量)적이지 아니한 것만은 사실이지만 인간심리로서의 인간의 성격이나 그 류형에 대해 파악하려고 노력하는 그 자체를 부인할 없다. 이를테면 인간성격의 한 류형으로서의 사이코패스(psychopath)는 반복적인 반사회적인 행동과 공감 및 죄책감의 결여 그리고 충동성, 자기중심 등을 특징으로 하는 전통적인 성격장애로서 이런 성격류형에 속하는 사람들로는 독일파쑈의 두목 아돌프·히틀러(Adolf Hitler, 1889~1945)로부터 악착한 수단으로 사람들을 련거퍼 죽인 세계 각국의 수많은 련쇄살인범들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례를 보이고 있다.
그러므로 MBTI는 정치학, 형사범죄학 등 여러 분야에서 사회적실용성을 갖추고있는 심리학적인 도구로 활용되고 있는 실정이므로 우리는 MBTI의 구체적인 활용에서 오류가 생길 수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인정해야 하지만 MBTI 자체를 비과학적인 것이라고 부정할 수는 없다.
이 글은 숏폼(Short form)시대에서의 독서의 필요성을 설복력 있게 보여준 문화수필이다. 확실히 영상시대에 들어서 종이책은 사양斜阳의 길로 접어들었다. 필자도 지금은 많은 지식과 정보를 종이책이나 종이신문이 아닌 컴퓨터나 아이패드를 통해 얻지만 종이신문은 몰라도 종이책은 여전히 필자에게 있어서는 필수적인 지식, 정보 획득의 중요한 수단과 자료이다. 그래서 지금도 필자는 하루의 적잖은 시간은 독서삼매경에 빠져서 즐거운 여생을 보내고 있다.
바빌로니아의 설형문자가 새겨진 진흙판 /
중국 고대의 책-죽간(竹简)
서양 고대의 책 -양피서(羊皮书) /
중국고대의 목판 인쇄
선장본 《홍루몽》 / 인쇄본 《홍루몽》
물론 필자는 근자에는 글을 쓰면서도 전자매체가 주축이 된 이 숏폼시대(중국에서 读图时代라고도 함) 정보수용자들의 특점을 감안하여 가담가담 재미나고 희귀한 그림들이나 사진들을 끼워 넣군 한다.
지난세기 8,90년대 중국 주류문단에는 하나의 중요한 현상이 나타났는데, 그것은 바로 일부 평론가들에 의해 거론된 “학자수필” 혹은 “문화수필”이란 형태였다. 이런 형태 수필의 작자들은 대부분 인문과학 혹은 사회과학 연구에 종사하는 학자나 교수들이였다. 이런 수필가들 중에서 가장 영향력과 대표성을 갖고있는 분은 여추여(余秋雨,1946~ )선생인데 그의 《문화고려(文化苦旅)》(1992), 《산거필기(山居笔记)》(1995)는 문화수필문의 경전으로 되였다.
여추우와 그의 문화수필집《문화고려》,《산거필기》
여추여를 비롯한 전반 중국 문화수필의 영향하에서 중국조선족문단에도 문화수필의 초기형태로 1999년에 류연산(柳燃山,1958~2011)의 문화수필집 《혈연의 강들》(상, 하)이 나타났고 2011년 필자의 문화수필집 《력사의 강 두만강을 말하다》(상,중, 하)가 나타났다. 이 점에 대해 필자는 약 한달 전에 출판된 한문판 《중국조선족문학통사》(하, 제274~275페지를 참조하라)에서 비교적 자상히 기술했다
2023년~2024년 이 두해 동안 문학지 《장백산》의 〈장백산 특집〉에 실린 이상의 10편의 글들은 절반 이상의 작자들이 중국 각급 대학의 조선족 교수들이고 그리고 그 내용들도 대부분 풍부한 문화내함과 짙은 문화사색의 성향을 지니고 있으므로 필자는 이 11편의 작품들을 뭉뚱그려 “문화수필”이라고 지칭하고 싶다. 만일 앞으로도 〈장백산 특집〉을 계속 이어나가려고 한다면 〈장백산 문화산문 특집〉이라는 타이틀을 달아도 무방하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작업이 우리중국조선족 문화산문 창작의 질적인 향상을 위한 좋은 밑거름으로 되였으면 하는 간절한 바램을 갖고 있다.
필자는 우리 문학에서의 문화수필의 조용한 현신을 기쁜 마음으로 지켜보면서 문화수필이란 이 문학양식이 앞으로 보다 건강하게 자라났으면 하는 간절한 기대를 갖고 있다.
[책임편집:홍려, 리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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