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향숙의 수필에 나타난 삶의 고민과 철학적 사고
배홍 / 평론
24시간 동안 휴대폰을 방치해두면 어떤 일이 생길가? 대저는 부재중 전화가 두자리수, 새로 뜬 메시지가 세자리수에 해당될 확률이 높다. 현재 우리는 온갖 메시지가 폭발하는 일상에 처해있다는 것이다. 그중에서 우리에게 유효하고 도움이 되는 소식은 과연 몇통이나 될가? 아마도 열손가락으로 족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왜서 휴대폰을 놓지 못하고 살가? 왜서 인터넷이 없는 생활은 이제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상으로 여길가? 제대로 려과되지 못한 메시지들이 삶을 혼란하게, 때로는 비극으로 만든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속에 빠져 살고 있는 존재가 오늘날의 인간이다. 주향숙의 수필 〈고요를 위하여〉, 〈말이 되지 못하는 것들〉, 〈시간은 무심하다〉는 이런 혼란스러운 일상을 살아가는 작가 개인의 고민이면서 동시에 이 시대를 살아가는 대부분 인간들의 고민이라 할 수 있다.
하이데거는 시를 짓는 것을 “존재가 스스로를 열어 밝히는 ‘고요의 울림’을 듣는 것”이라고 표현하였다. 그러면 하이데거가 말하는 시는 ‘고요의 울림’이라는 것인데 여기서 ‘고요’란 우주의 본질 즉 사물의 근원이 된다. 또한 하이데거는 현대인들을 고향을 잃은 존재라고 갈파했으며 그에게 있어서 시란 존재 근원에 대한 통찰이라는 의미에서 귀향의 노래이다.
수필 〈고요를 위하여〉에서 작가가 갈구하는 ‘고요’는 사실 우주의 본질을 향하는 하이데거의 ‘고요’와 비슷하다. 현대인들의 일상은 충돌, 충격, 불안, 혼돈 등으로 가득차있다. 무질서하게 얽혀있는 현대인의 상태를 작가는 “몸과 맘과 정신이 분렬되고 파괴되는 것”이라고 했다. 이러한 분렬은 인간을 히스테리적으로 만들기도 하고 과도한 반응과 예민함을 초래하기도 한다. 사실 간단히 해석하자면 현대인의 생활의 절주가 지나치게 빨라지면서 초래되는 반응과 정서들이 바로 이러한 것이다. 왜서 과학기술은 이미 급속도로 발전하여 4차 산업혁명이라고 일컫는 인공지능의 시대에 들어섰건만 사람들의 행복지수는 점점 떨어져가고 있을가? 리해도, 공감도, 소통도 어려워지는 시대의 답을 작가는 ‘고요’에서 찾으려고 한다. 그런 ‘고요’에 대해 작가는 “함부로 흔들리거나 깨지지 않는 깊고 단단한” 것이라고 추측한다. 즉 언제나 그 곳에 있는 변하지 않는 것, 존재의 가장 근원적인 것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현재의 삶을 살아가는 인간에게 있어서 찾고저 하는 근원은 어디에 있을가? 관념적으로 그것이 ‘고요’였다면 실재하는 그 곳은 고향이 될 수 있다. 세멘트와 고층건물에 둘러싸인 현대인들의 삶은 정녕 오래전 인류 기억 속의 고향과 거리가 멀어졌다. 다수의 ‘00후’ 세대들에게 있어서 더 이상 ‘내가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이 아니다. 하지만 ‘떨어진 락엽은 뿌리를 찾아간다’는 말이 있듯이 인간의 마음속 깊이에는 언젠가 돌아가고 싶은 고향이 떠오른다. 이 때의 고향은 물리적인 고향이 아니라 정신적 고향에 더 가깝다. 고요한 엄마의 자궁 속에서 심장의 박동소리만 감지하는 그런 고향이 된다. 물론 작가가 갈구하는 ‘고요’에 대한 해석은 글을 읽는 부동한 독자들에 의해 달리 리해될 수 있지만 무의식 속에 남아있는 고향에 대한 상상이나 기억과 이어진다는 것은 분명하다.
결국 작가가 고요를 위하여 떠나고 싶은 것은 정신적 고향으로의 회귀이며 그것을 현대인의 귀향의식이라 하겠다. 곧바로 그 ‘고요’ 속에 “해살의 속살거림과 봄빛 속에 흩날려 떨어지는 꽃잎”을 담아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가 피여나는 그립던 동네를 만나고 싶은 갈망인 것이다. 그것은 단순한 듯, 작은 듯 보이겠지만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무궁무진한 에너지를 지니고 있으며 존재의 근원이자 세상만물의 본질과 동력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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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임편집:리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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