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백산》2024년 제5호 | 봄보미苞米-엄마의 화장(수필)

文摘   文化   2024-10-24 08:00   吉林  

종이잡지-수필



엄마의 화장

봄보미 / 수필

어린시절부터 나는 엄마의 화장하지 않은 생얼을 본 적이 없다. 마치 화장을 안 한 자신의 모습을 받아들일 수가 없듯이 엄마는 언제나 곱게 화장을 했다. 엄마에게 화장은 자신을 추스리기 위한 피로회복제 같은 거였을가, 가시덤불을 헤치고 앞으로 나갈 수 있는 갑옷 같은 거였을가, 아니면 험한 세상을 겁없이 살아낼 수 있는 마법 같은 것이였을가?

1

엄마는 젊은 시절부터 이쁜 것들을 좋아했다. 손재간이 좋아서 수놓이 수준도 나가서 팔 수 있을 정도이고 복장점에서 파는 옷 같은 것들은 항상 고쳐 입곤 했다. 낡은 옷들도 가끔은 소매 혹은 옷깃 부분을 새롭게 손질하여 새 옷으로 거듭나게 했다.

연변에서 최초의 미용원이 금방 개업할 때에 엄마는 단돈 10원을 주고 쌍꺼풀을 했다고 하니 아마 미에 대한 추구는 동시대에서 앞장을 달렸던 거라 볼 수 있겠다. 그 때는 화장이라 해봤자 흰 분만 바르는 정도였고 많은 아줌마들은 아예 화장을 하지도 않았던 시기였다. 그런 시대분위기에 엄마는 벌써 아이섀도에 연지에 얼굴에 울긋불긋 색조화장을 하고 다녔다. 보다 못해 외할머니가 “으이그, 저 눈두덩이에 색칠한 거 그냥 확 지워버릴가 부다.” 하고 혀를 끌끌 찼다고 한다. 어린 내 눈에 비친 엄마의 화장한 얼굴은 반짝반짝 빛이 났다.

내가 기억을 못하고 있는 우리 집이 나름 가장 호황기시절, 아버지는 공장에서 잘나가는 일군인지라 부지런히 집터를 넓혀 덩실한 집도 3채나 일궈놓고 마을에서 처음으로 텔레비죤을 구입했다. 인품 또한 좋아 매일같이 사람들이 몰려와 웃고 떠들며 텔레비죤을 보고 놀았다. 하지만 그 호황기는 아주 짧았다. 개혁개방의 거세찬 바람이 불어오던 1980년대, 아버지는 잘나가던 공장을 때려치고 목재장사를 시작하며 한몫 크게 벌었고(나는 가끔 생각한다. 그 때 그 목재장사에서 실패를 했더라면 혹시 안정된 월급쟁이 가정으로 조용하게 살아가지 않았을가?) 그에 힘입어 아버지의 장사 스케일은 점점 더 커져갔다. 하지만 장사 스케일이 커지면서 집터는 3채에서 2채로 줄어들었다가 다시 1채로 되고 나중에는 비좁은 세집으로 옮겨가야만 했다. 빚쟁이들이 하루가 멀다 하게 들이닥쳤고 아버지는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에게 있어서 아버지가 들어오지 않는 것은 일종의 해탈이였다. 그 때 쯤 나는 그 지긋지긋한 다툼소리에 신물이 났다. 집에서 다툼이 시작되면 나는 문을 박차고 나가버려 밖에서 늦게까지 배회했고 엄마의 화장은 얼룩이 져있었다.

아버지가 사라진 뒤 우리 집에서는 가까스로 안정을 찾았지만 엄마의 화장은 생기를 잃었다.

2

익숙한 빨간색 세단 승용차가 우리 집 옆에 세워져있던 그 날, 엄마가 밤새 자리를 뒤척이던 날이기도 했다.

“나 그 인간과 리혼했다니깐. 사람도 없고 돈도 없으니 이렇게 죽치고 있든 신고를 하든 마음대로 해!”라는 엄마의 악에 받친 호통이 집 밖까지 쩌렁쩌렁 울렸다. 오른쪽으로 굽어들기만 하면 우리 집이 보이는데 나는 발이 땅에 얼어붙은 듯 움직일 수가 없었다. 멀리서 승용차(그 때만 해도 승용차를 볼 수 있는 기회는 아주 적었다.)만 보면 나는 심장이 후둑후둑 뛰고 불안증세를 보였다. 내게 그건 아무리 애를 써도 무찌를 수 없는 거대한 괴물 같은 것이였다.

“휴- 저 집안도 기가 막히긴 하지.”

“남편 잘못 만난 것도 죄라면 죄지 뭐.”

잠시후, 그들은 빨간 차에 올라타 가버렸고 나는 한참을 자리에 멍하니 앉아만 있었다.

이튿날, 잠을 잘 자지 못했는지 눈이 빨갛게 충혈된 엄마는 거울 앞에서 오래도록 화장을 했다. 누가 봐도 살짝 부담스러울 법한 짙은 화장이였지만 엄마의 근엄한 표정과 묘하게 어울렸다. 아침 일찍 차려입고 나가던 엄마는 커다란 밀차 하나를 끌고 오셨다. “이거, 진짜 튼튼하고 좋지? 정아바이네 쓰던 밀차인데 이거면 물건 팔기 딱일 것 같아.” 엄마의 화장을 다 씻어버릴 듯 땀은 비 오듯 흘러내렸다.

서시장 바깥매대를 대폭 개발할 때, 엄마는 겁도 없이 덥석 중고 밀차 하나로 장사를 시작했다. 제대로 된 매대도 없는지라 매대세도 없고 그냥 밀차만 달랑 하나 끌고 가면 물건을 팔 수 있었다. 세제, 치약, 비누 등을 넘겨파는 거였는데 부근의 좀 큰 가게에서 먼저 일정량을 갖다 팔고 판 돈으로 다시 물건을 들였기에 본전도 안 들고 밑질 일도 없는 장사였다. 장사라곤 해본 적도 없는 엄마가 무작정 장사를 하겠다고 하니 걱정도 되였지만 오랜만에 보이는 그 열정이 살짝 감동스러웠다.

엄마의 가벼운 한숨이 다급한 숨소리로 바뀌면서 붕 뜬 화장이 이쁜 화장으로 바뀌였고 우리 집도 점차 생기를 찾기 시작했다. 특히 저녁마다 빨간 립스틱을 바른 입으로 침을 탁 묻혀 꼬깃꼬깃한 1원짜리, 2원짜리 돈들을 한장한장씩 펼 때, 부지런히 계산기를 두드리고 나서 장사노하우를 얘기할 때에는 더욱 그랬다.

“손님이 가리키는 첫 물건은 절대 높은 가격을 부르면 안돼. 다른 매대에 가서도 물었을 수 있거든. 가급적 낮은 가격을 불러서 내 고객으로 만든 뒤 두번째 물건부터는 정상적으로 불러도 돼. 보통은 일용품을 하나만 사려고 이 먼 데로 오지 않거든.”

“일용품 같은 건 수량으로 해먹지 절대 몇푼 더 받겠다고 단가에서 욕심을 부리면 안돼. 장사는 결국 단골이 답이야.”

“물건은 사람 보고 팔아야 돼. 아줌마와 나그네들한테는 값이 싸고 량이 많은 걸로 주면 거의 틀리지 않아. 대신 아가씨들한테는 이쁘고 질 좋은 거로 줘야 돼.”

“아줌마와 아저씨들은 좋아하는 게 완전 다르지 않나요?” 내가 이상해서 물으면 “다르지. 아저씨들은 아예 일용품에 관심이 없어. 뭘 추천해도 다 살 거란 말이야. 근데 그 물건들을 집에 사가고 나면 누가 주로 사용하냐? 아줌마들 아니겠냐? 사갖고 들어가면 또 꼬치꼬치 캐겠지. 마음에 안 들면 또 뭐라 바가지를 긁을 거고. 그래서 아줌마들 좋아하는 걸로 골라줘야 하는 게야.”

엄마의 장사노하우는 끝도 없이 흘러나왔다. “너무 신기하지 않니? 나 말이야, 처음 알았다. 내가 그렇게 장사를 잘하는 사람이라는 걸.” 물건을 사는 사람들이 항상 첫번째 매대 아줌마를 거쳐 엄마한테 와서 산다는 일설은 어디까지나 우리 엄마 혼자얘기이긴 했다. 

엄마의 장사가 승승장구하고 있을 즈음, 어려움 하나 있었는데 바로 일용품을 잔뜩 실은 그 밀차를 밀고 오는 것이였다. 아무리 적게 들여온다고 해도 재고는 있기 마련이고 그 무게가 또 장난이 아니였다. 첫 한달은 우격다짐으로 끌고 오기는 했는데 온 하루 장사하고 체력이 거덜난 상태에서 그걸 끌고 돌아오면 몸은 둘째고 이튿날 또 그대로 가져가야 하니 무리가 아닐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부근에 사는 사람네 창고에 돈을 좀 주고 보관해두기로 했는데 그게 사단이였다. 며칠 뒤 밀차까지 통채로 도둑맞았다. “그 날 뒤따라오던 그림자가 수상하긴 했어.” 엄마의 화난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렇다고 주저앉을 엄마가 아니였다. 이미 장사에 맛을 본 엄마는 이곳저곳 수소문해서 보따리장사를 시작했다. 서서 손님을 기다리는 것보다 발로 뛰는 장사를 한번 해보자는 생각으로 농촌의 이곳저곳 다니면서 물건을 팔기 시작했다. 1990년대의 농촌은 물건 파는 가게들이 거의 없었고 시내로 나와야만 필요한 것들을 챙겨갈 수 있었을뿐더러 교통도 편리하지 않아 뻐스역까지 가려 해도 긴 걸음을 해야 했다. 명태로부터 시작해 비누 등 일용품, 옷가지들… 농촌에서 필요한 것에 따라 엄마의 품종도 계속 바뀌였다. 엄마의 말에 따르면 겨울은 농촌에 장사하기 가장 좋은 시기라 한다. 남녀로소가 밭일을 나가지 않아 헛물 켜는 집이 거의 없고 1년내 농사를 해서 번 돈을 손에 쥐고 있던 때라 뭐든 쉽게 팔린다고 했다. 겨울 아닌 계절이라고 해도 빈손으로 온 적은 없긴 하다. 하다 못해 밭에서 심은 감자나 쌀 한주머니라도 바꿔서 오곤 했으니.

“엄마는 농촌에 발로 뛰는 보따리장사군인데 화장을 왜 그리 이쁘게 하는데?” 생각없이 훌 던진 나의 물음에 엄마는 약간 멈칫하더니 이내 “농촌사람들은 이쁜 거 모른다더냐? 너는 우리 집에 이쁘게 치장을 한 사람이 문을 떼고 들어섰으면 좋겠니? 아님 먼지를 폭 뒤집어쓴 아줌마가 들어왔으면 좋겠니?” “음…” 하긴, 반박할 말이 없다.

멋따개(멋쟁이) 엄마를 둬서인지 나는 옷 하나는 잘 챙겨입었던 것 같다. 잘 못 먹는 꼴은 봐도 잘 못 입는 꼴은 못 보겠다는 엄마의 막무가내 선언이다. 너도나도 ‘잘 먹고 잘살자’가 아닌 ‘잘 먹으면 잘사는 것이다’라는 관념이 머리에 깊이 차지한 그 때에 엄마의 선언은 난해한 나머지 허영스럽기까지 했다. 인간은 가끔 생존에 직결되는 구체적인 무엇보다는 막연히 생존 너머의 어떤 추상적인 것을 붙들고 산다. 그것이 누구에게는 종교이고, 누구에게는 대의이고, 누구에게는 꿈 같은 것들이 아닐가 싶다. 엄마를 살게 한 그 추상적인 실체는 무엇이였을가? 누군가의 ‘잘살고 있다!’는 평가와 시선이였을가? ‘잘살고 있다’는 스스로 목 터지게 웨쳐대는 소리일가? 백설공주의 계모처럼 어쩌면 엄마도 수도 없이 거울을 보고 세상에서 누가 제일 이쁜지를 물어보았던 게 아닐가? 그리고 동화 속에 눈치 없는 거울과는 다르게 화장을 한 거울 속의 엄마는 “네가 제일 이뻐!”라고 용기를 내 답해주었던 게 아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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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임편집:리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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