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백산》작품토론회】김창영金昌永-《장백산》에서 ‘80’후의 시를 읽다

文摘   文化   2024-10-22 08:00   吉林  



《장백산》작품토론회


《장백산》에서 ‘80’후의 시를 읽다

김창영
국경절 련휴를 반나절 앞두고 장백산잡지사 홍려편집으로부터 련락이 왔다. 10월 13일 장춘에서 〈문인간담회〉를 조직할 예정인데 간담회 발표임무 있다며 최근 2년간 《장백산》 발표된 ‘80’ 시인들의 시작품을 언급하며 장백산잡지사의 원고 채택과 편집에 대한 의견이나 건의를 듣고 싶다는 것이였다. 아차 했다. 솔찍히 말해 우리 시단의 ‘80’후들에 대해 생소한 면도 있고 그들의 시작을 품들여 연구해본 적이 없기에 그들의 시작에 대해 왈가왈부할 면목도 자신도 없었기 때문이였다. 또 한편10대에 시를 공개간행물에 발표하기 시작해서 지금 60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였으니 시력이 근 40년이 되나 시평은 종래로 써본 적이 없기 때문이였다. 이미 가겠다고 답한 이상 울며 겨자 먹기로 ‘임무’ 응하는  밖에 없었다.

《장백산》에서 곧바로 ‘80’ 시인 6명의 시작을 파일로 보내왔다. 받는 즉시 읽기를 거듭했다. 그리고 나는 이내 내 자신의 게으름과 오만에 부끄러움을 감출  없었다. 《장백산》을 창간호부터 시작해서 한기도 빠짐없이 구독하여 오면서도 특히 최근 10여년 간은 잡지를 손을 때마다 목차에서 면목이 있는 작가, 시인들의 작품들을 먼저 골라서 읽고 기타 작가, 시인들의 작품은 소홀하게 대해왔던 게 사실이다. 게으름이라면 약과다. 이건 분명히 오만이였음을 이번에 ‘80’ 시인들의 시작을 읽으면서 뼈저리게 느꼈다. 하여서 이번에 홍려편집이 보내온 ‘80’후 시인들의 시작을 대하는 내 태도가 심히 공손해졌음을 솔직하게 고백하며 미안함과 함께 사과의 말씀을 올린다.

편집부에서는 구체적 시작의 작품성을 론하면서 잡지사의 원고 채택과 편집에 관한 의견이나 건의를 듣고 싶다고 주문했지만 나는 시작의 작품성 따로, 잡지사의 원고 채택, 편집방향 따로 극히 개인적인 생각을 털어놓는다.

뭐니 뭐니 해도 나는 잡지사에서 산재지구 문인들에게 따스한 눈길을 보내는 정성에 박수를 친다. 집안 량수란 산골벽지에서 문단을 기웃거릴 때 가장 먼저 손을 잡아준 잡지가 《장백산》이였다. 남영전사장 때부터, 리여천사장을 거쳐 현재 안미영사장까지 그리고 홍려편집, 리혜편집을 비롯한 장백산 식구들 모두 한집안 사람처럼 정기적으로 련락을 취해 시창작 상황을 료해하군 하는데 이는 나의 창작열정을 불러일으키는 령단묘약이였다. 내가 지금까지 《장백산》 발표한 기타 시작은 차치하고 〈서탑〉 련작시 200수를 련재할 수 있은 것은 《장백산》의 지지와 고무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것이였다. 이번 기회를 빌어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나뿐만이 아니다. 이번에 내가 이 회의에 온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우리 심양의 전정환 등 제씨들도 꼭 잡지사에 고맙다는 인사를 전해달라는 부탁이 있었다. 《장백산》이 있어 글쓰는 동력도 생기도 글쓰는 재미도 느낀다는 것이 우리 료녕 문인들의 공동의 마음이다.

중견문인들에 대한 조명과 신진문인들에 대한 배려도 장백산 특점이다. 시기적으로 작가초대석, 기획조명, 특별조명 등 컽명을 달리하기는 했으나 지역과 장르에 국한되지 않은 포용성이 좋았다. 소설, 시, 수필, 실화(장편르포) 등 장르 제한 없이 작품성만 뛰여나면 편집부에선 적시적으로 특별조명을 것으로 알고 있다. 소설에서도 장편, 중편, 단편 제한없이 작품성을 우선으로 조명을 기획했었다. 나는 장백산 특별조명 코너가 곧바로 장백산 매력이자 생명이라 생각한다. ‘80’후뿐만 아니라 ‘90’후, ‘00’후들에게도 의식적으로 지면을 할애하여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는 시종 변함없는 《장백산》 원견성을 남김없이 보여준다.

주류문단의 력작들에 대한 주목과 번역소개도 간과할 없다. 우리 조선족문학은 자체의 독립성과 특수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주류문단과 기타 소수민족문학의 영향을 벗어나 존재할 수 없으며 그러한 전제하에서 주류문단과 기타 소수민족문학의 선진적인 리념과 우수한 창작방법을 흡수하면서 발전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가장 민족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는 말도 있듯이 민족성과 세계성은 동떨어진 것이 아니다. 문학작품은 민족성 안에 세계성이 있고 세계성 안에 민족성이 숨쉴 때 진정 영원한 생명력을 잉태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하여 극히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잡지사의 번역작품 소개가 가지는 의의는 극히 심원하다고 할 수 있다.

《장백산》의 권두언은 잡지의 백미다. 우리는 《장백산》의 권두언을 통해 다다소소 주류문단의 흐름이나 소중한 정보들을 료해하게 되는  편집부에서 향후 권두언 조직에 좀더 심혈을 기울이였으면 하는  바람이다.

아래 편집부에서 보내온 ‘80’후 시인들의 시작에 대해 선택적으로 개인적인 감상을 언급해보겠다.

류선희시인의 시작은 모두 5수였다. 그중 허수아비의 구두 시제를 보는 순간 나는 아주 잠간 흠칫했다. 허수아비의 구두라고? 허수아비는 곡식을 해치는 새나 짐승을 막기 위해 막대기와 짚 따위로 사람의 형상을 만들어 밭에 세우는 물건을 말하는데 통념상 사람의 형상을 만든다 하여도 대개 무릎 웃부분이 위주지 발까지 만드는 허수아비는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헌데 허수아비의 구두라고? 아주 역설적으로 느껴졌다. 사실 허수아비는 쓸모가 없거나 실권이 없는 사람, 남이 시키는 대로 행동하는 사람을 비유적으로 말하기도 하는데 그러면 허수아비의 구두 시제를 아주 자연스럽게 접수할 수도 있겠으나 시작을 읽으면서 나는 허수아비의 파생적 의미는 배제시켜야 했다. 그리고 시의 마지막 구절인 “나는 / 구두보다 못한 자식이였습니다 읽는 순간 무릎을 쳤다. 시인은 이 시를 읽는 키를 시의 맨 마지막에 숨겨놓았던 것이다. 우리는 시적 화자의구두보다 못한 자식이였다는 고백에서 구두의 주인공이 부모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그리고 당신이 원하는 곳으로 출발하던 아침과 / 긴긴 어둠으로 잦아들던이라는 시어에서 아침일찍 일하러 나갔다가 날이 어두워서야 집으로 돌아오군 하던 구두의 주인공이 아버지임을 깨닫게 된다. 혼자가 혼자의 닻이 되고 / 노가 되여 허둥대던 시간” 동안은취하지도 않던 근심들이 아버지를 떠나지 않는다. 이제는 저세상 사람이 되여서야 드디여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못했던 루추한 모습 거리낌없이 드러내놓고바람부는 대로 드리는 자유의 몸이 것이다. 이생에서 아버지와 함께 하며 “터벅터벅 / 뚜벅뚜벅” 아버지의 살붙히였던 구두는 저생에서도 아버지를 지키는 살붙히인 것이다. 구두보다 못한 자식이였다는 시적 화자의 참회가 가슴을 저미는 가운데 이생에서나 저생에서나 부모는 도대체가 어떤 존재일가라는 화두가 머리속에 자리를 튼다.

〈치매〉 〈허수아비의 구두〉의 자매편이라 있다. 세연을 접은 아버지를 이어 치매에 걸린 어머니를 시화하고 있다. 요즘 세월 아무리 의술이 발달되였다고 해도 일단 치매에 걸리면 사회생활을 하는데 필요한 지능, 의지, 기억 따위 정신적인 능력이 상실된 상태에서 헤여나오기 어렵다. 환자 앞에 효자 없다고 시인은 말을 듣지 않냐고 /  자꾸 힘들게 하냐고” 어릴 엄마가 내게 했던 말을 그냥 그대로 되돌린다. 그렇게 서로 역할을 바꾸었다가 서로 서로 더는 엄마 아닌 딸도 아닌 립장이 된다. 엄마도 아니고 딸도 아니여서 그게 더더욱 슬퍼서 시가 절절하게 안겨온다.

박연의 〈걸음〉 다소 철리적이다. 시간이 공간으로 남을 때까지 / 공간이 시간으로 늘어질 때까지”, “세속의 잡다한 속박들을 벗어던지고 그냥, 본능적으로 걷다 보니 생명의 의의는 오직 오늘에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리하여 모든 것이 사라지고”, “두발만이” 오늘을묵묵히 걸어가고 것이다. 어제는 지나간 오늘이고 래일은 다가올 오늘이기에 오늘에 충실하는 삶만이 진정한 삶임을 시적 화자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시 〈해빛〉 다소 생경하지만 해빛으로 자화상 그린다는 상상에 높은 점수를 준다.

변일의 〈겨울숲〉 한폭의 아름다우면서도 진중한 화폭을 독자들 앞에 펼쳐보이고 있다. 나비의 날개짓눈꽃의 살결숲을 흔들며” 다가오는 아름다운 화면 뒤면에는날개 접힌 소매바람에 서둘러 떠난 눈발 따라” “피고 동안 “열반” 드는 진중성이 깔려있다. 그리하여 가슴에 구겨넣은 모닥불의 온도가 / 다시 발톱이 닳은 새를 마주할  /  차는 보리밭엔 봄이 다. “겨울숲” 결국 차는 보리밭 다가올 봄을 마중하기 위한 무대배경으로 삶의 현장인 것이다.

변일의 다른 한수의 그리움 익은, 혹은 못 다한 사랑이야기를 쓰고 있다. 꽃잎처럼 날아와 서성인 봄이였다가 / 버들개지처럼 말랑한 련정이였으나느닷없이 울음을 토해내는 부질없는 봄비어설펐던 사랑이였으며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 숨어들어” 유심히바라보아야만 빛낼 아는 별이여서” “곁에 고도잊혀갈 줄은 전녕 몰랐다”.

감고 찾아온 봄바람에 딸려온 그리움 / 어느 해의 가지에 맺혀졌던 누구의 그리움 /  그리움이 그리움에서 그리워지며는 / 그리움은 언제  그리움이 되였던 걸가

보는 바와 같이 시작은 3련에서 첫 두련의 시적 정서를 더욱 승화시키지 못하고 추상적인 언어놀이에 그친 느낌을 주는 아쉬움이 있으나 이루어지지 않은 첫사랑은 대개 이러하리라.

배소윤의 〈코스모스밭에서〉 〈연변박물관에서〉 두수를 인상 깊게 읽었다. 두수 다 시적 완성도가 높은 수준급이여서 우리 시단의 밝은 미래를 보는 듯했다.

할머니 령전에라는 부제가 붙은 〈코스모스밭에서〉 시적 화자는 할머니의 일생을 반추하고 있다.

바람 없는 날에도 /  허리는 수없이 휘청거렸다

가족을 위한 일에 온갖 정성을 깡그리 몰부어오며 기력이 쇠잔해질 대로 쇠잔해져 바람없는 날에도 허리가 휘청거린다. 이처럼 산전수전 온몸으로 다 겪어왔음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하늘 향해 얇은 귀를 열고 것은애써 감춰진 통증 만큼이나 깊어진 / 야윈 가슴엔 하늘이 숨쉬고 었기 때문이였다. 여기 하늘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으로 할머니는 한 가족의 오늘과 래일을 개척온 것이다. 이러한 할머니가 어느 가을날 하루살이처럼 조용히 바람 속에 한세상 묻었다.” 시적 화자의 기억 속에잃어버린 가을 흐트끼던 / 그 날의 코스모스 영원히 각인되였으리라!

시에서 “하루살이” 시어를 대하는 순간에는 한국 조오현 스님의 〈아득한 성자〉란 시가 생각났다. 하루라는 오늘 / 오늘이라는 하루에 // 뜨는 해도 보고 / 지는 해도 보았다고 //  이상 없다고 / 알까고 죽는 하루살이떼로부터죽을 때가 지났는데도” 살아있지만 어느  하루도 같지 않고 보면” “천년를 성자도 아득한 하루살이떼에 불과하다는 시인데 배소윤 시인의 시에 등장하는 할머니는 성자 다름 아니리라!

배소윤의 다른 한수의 〈연변박물관에서〉점토상 앞에서 부제가 시를 읽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 현재를 서있는 조각상필름을 거꾸로 리며 력사를 말하고 있다. 시대를 뛰여넘으며억겁 세월을 넘나드는 어느 쯤에서 부서져 먼지로 남아 /  한번의 죽음을 살아가 되는데 죽음으로써 살아가는 것은 조각상의 삶의 방식인 것이다. 헌데 어찌 조각상뿐이랴? 이 세상 살아가는 사람(먼지 속을 걷는 사람들)들 또한 조각상 다름 아니다. 아무리 치렬하게 살아간다 한들 카메라 속 한장의 사진으로 남을 인간에게 장인의 거친 손끝” 매달렸을 한조각 분신잃어버린 것들을 더듬고 서서” “오래된 미래를 질문한다.” 다가올 미래가 아닌 과거형의오래된 미래라는 표현은 세상 모든 것들이 궁극에는 박물관 안의 한단락의 력사에 지나지 않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전지현의 시를 읽으며 시인만의 강한 개성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시 회전목마 추락 사건 제목에 엉뚱한(묘한?) 시적 장치를 숨겨두고 있다. 추락은 높은 곳에 떨어짐을 말하는데 시인은 회전목마에서의 떨어짐을 하나의 사건이라 명명해놓고 정작 본문에서 추락 사건의 구체적 행위에 대해서는 함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왜 추락하는 높은 곳이 굳이 “회전목마”냐이다.

먼저 구체적인 시의 내포를 보면 “도망가자” 총적인 욕망아래지나온 시간이 반복되여 흐르던 “나를 둘러싼 이 별의 모든 피조물들이 / 축복의 약속이라 여겨지던 / 행복을 발설하던 곳”은 도망의 목적지요, “변하지 않는 풍경에 새로운 계절을 입히고 / 내가 담겨있던 필림에 다시 가만히 안”기는 것은 목적이요, “겨울의 유서로 피여난 봄이 / 다시 모든 계절을 짓이겨 겨울이 되는 /  고단한 작업의 축제가 / 지상에 내려와 심장소리를 내”도록 하는 것은 바라는 효과다. 그리고 이런 더 나은 삶에 대한 갈망의 실현이 한 인간의 성숙을 필요로 하고 있고 보면 “회전목마”(유년)에서의 “추락”(탈출)은 필연코 하나의 “사건”임에 틀림없다. 허나 그 “추락” 쉽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강한 반항의지가 필요하기에 시적 화자는 “도망가자” 사자후를 내뿜는 것이다.

전지현의 영화 말고 평범하자 세상 가장 달콤한 사랑을 담담한 어조로 읊조리고 있다. 사실 우리 아무 것도 하지 말자 함께 사는 동안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모든 일들은 회피하지 말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자는 뜻일게다. 내 옆에 네가 있고, 네 옆에 내가 있고, 또는 내 옆에 네가 없고, 네 옆에 내가 없어도 서로 각자 또는 함께 서로에게 나눠줄 이야기를 모으는 삶 그리고 그 이야기의 끝은 행복인 삶은 단연코 이 세상 가장 달콤한 사랑임에 틀림없겠다. 이 시에서 보여준 사랑은 득도의 경지다.

토정의 시는 언제봐도 한결같다. 시 〈승무〉 로련미가 넘치는 문장력으로 펼쳐보이는 춤사위 속에 그만의 독특한 사유가 녹아든 시세계가 놀랍다. 지금까지 토정시인 말고 어느 시인이 중이 경문을 외면서 집집이 다니며 동냥하는 일이나 절에서 식사 때 중들이 바리때를 들고 식당에 가는 일인 탁발을 고깔과 장삼을 걸치고 두개의 북채를 쥐고 추는 민속춤인 승무로 시적 상상의 세계를 펼쳐보였는가 말이다.

탁발이 세간의 온갖 번뇌에서 벗어나는 가장 원초적인 행위방식이라면주름진 번뇌를 우기 위해선 “승무”  “멈추지 어야 일이다. 엷은 하이얀 고깔 피여날” 때까지, 붉은 심장 푸른 주먹 잠에서 깨여날” 때까지, “보습에 끌려온 보리고개/채찍으로 얼룩진 등가죽 서러울” 때까지 “승무” 진정 멈추지 말어야 일이다. 그리하여 엄연히 좌해 고鼓를 향해일고一鼓에 머물지 아니할/거침없이 련타连打로/독무는 외롭지 아니할때까지 “승무” 기어이 멈추지 말어야 일이다. 이제 우리는 승무에 등장하는 북은 일반적인 북이 아닌 부처앞에서치는 북이나 예불할때나의식때치는북임에 주목할 필요가 있겠다. 그리고 아차 하는 순간 일고一鼓에 머물지 아니할/거침없이 련타连打로/독무는 외롭지 아니하 리유를 깨칠 것이다. 세간의 온갖 번뇌가 머리 속을 떠나는 순간이다.

토정시인과는 안면식도 있고 또 맥주잔을 마주치며 시를 론한 적도 있어서 언제 봐도 한결 같은 그의 시를 왈가왈부하는 것은 주제넘는 짓이여서, 이 시점에서 이번의 횡설수설을 끝내면서 여러 동인들께 미안함을 전하는 동시에 장백산잡지사에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책임편집:홍려, 리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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