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문학나무
김춘택 / 수필
고향에서 문학습작을 할 때 나만의 문학나무 두그루가 있었다. 그 두그루의 나무는 능금나무와 자두나무였는데 내가 16세 때 아버지가 심어둔 것이였다. 그 해 나는 작가로 되겠다고 선언을 했다. 그러자 아버지가 그 두그루의 과일나무를 심으며 내게 말했다.
“네가 나중에 작가가 되겠는지 모르겠으나 어쩜 네가 꿈 하나는 바로 잡은 것 같다. 다리병신이 이담 뭘 해 먹고 살겠니. 정말 글쓰는 사람이 되여 글로 벌어먹는다면 여북 좋겠니? 내 이 두그루의 과일나무를 심는 건 과일을 먹어볼 생각이 있어서다. 그런데 네가 천방지축 기어코 작가가 되겠다고 하니 그 목표를 이 두그루의 과일나무에 걸어두도록 해라. 아마 이 능금나무와 자두나무에 능금과 자두가 열리려면 6년은 걸릴 것이다. 그러니 6년에 처녀작 하나 내는 거로 하고 10년에 작가로 성공하도록 해라. 하지만 네가 초중도 채 다니지 못하고 학교를 그만두었으니 어떻게 작가가 되겠니? 나는 애초에 큰 기대 같은 건 안 한다. 대신 열심히 노력해보도록 해라.”
아버지가 능금나무와 자두나무에 나의 작가목표를 걸어보라고 하면서도 별로 기대 같은 건 하지 않았다. 그럴 만한 리유가 있었다. 나의 작가선언은 바로 초중 1학년을 다니다가 중퇴를 하면서 언감생심 내놓은 허황한 꿈 같은 것이였기 때문이다. 그러니 내가 작가가 될 확률은 애초에 없었다. 그래서 사실 아버지도 과일나무를 심으면서 나를 심히 빈정거린 것이였다.
나는 천성적으로 학교공부가 어려운 사람이였다. 중학교 과목에서 어문, 력사, 지리를 잘하는 외에 대수, 기하, 한어, 일어 등은 늘 빵점이였다. 그래서 내 성적은 반에서 거의 꼴지 수준에 머물러있었다. 학교공부는 내게 근본 어울리지 않았다. 그리고 다리가 불편한 사람은 나중에 대학도 갈 수 없다고 했다. 기껏해야 초중까지 의무교육을 받아야 하는 수준이였는데 나는 화가 치밀어 차라리 그럴 바에는 자습을 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하여 학교를 그만두고 집으로 와서 작가선언을 해버린 것이였다. 그렇다고 문학에도 별로 자신이 없었다.
나는 본의 아니게 마당에 심은 능금나무와 자두나무에 꽃이 피고 맛 좋은 과일이 달리기를 기대하며 본격적으로 문학을 시작했다. 마을의 청년도서관에 들어박혀 수백권의 문학도서를 읽으면서 문학습작을 해갔다. 말이 쉬웠지 나의 문학창작은 별로 진척이 없었다. 그저 세월을 붙잡고 늘어지면서 꼭 성공하겠다는 체념뿐이였다.
마당에 심은 능금나무와 자두나무는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기 위해 해마다 다르게 자라갔다. 3년이 지나자 두 나무의 밑동은 내 팔뚝만했고 1메터 높이의 선에서 큰가지 서너가닥을 뻗어올리면서 잔가지들을 쳐갔다. 그러자 어머니는 해마다 겨울이면 배추시래기를 그 서너가닥의 큰가지 사이에 걸어두었다.
한겨울 어머니가 능금나무와 자두나무에 걸어두었던 배추시래기를 내려 시래기국을 끓일 때마다 아버지의 잔소리가 심했다.
“너의 문학나무에서는 배추시래기만 가득 달리는구나. 작가를 해먹겠다는 놈의 네 글은 언제 달리느냐? 늘 끓다가 마는 너의 남비열정이라면 제발 그만두어라. 이제 저 과일나무는 5년째다. 명년이면 6년이 돼서 꽃도 피고 열매도 달리겠는데 네 꿈은 바로 공산空山이 될 거 같다. 이루지 못할 꿈이라면 동네를 부산하게 하지 말고 애초에 싹 거둬치워라.”
이거 내가 공연히 작가선언을 해놓아서 아버지에게서 자주 듣는 잔소리였다. 동네사람들이 나의 작가선언을 부정적으로 받아들였고 나를 슬그머니 ‘김작가’라고 불러주며 골탕을 먹이는 사람들도 있었다. 아버지는 그게 화가 난 것이다.
그런데 그 해 아버지는 암으로 세상을 등지다 보니 내가 작가로 성공하는 것을 영원히 보지 못하고 말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듬해에 우리 집 마당에 심은 능금나무와 자두나무는 꽃을 피우고 십여개의 능금과 자두를 맺었다. 아버지의 말처럼 6년 만의 일이였다. 그러나 그 때까지 내 글은 한편도 발표되지 못했다. 애초에 편집부에 내 글을 보내지 않아서 다행이였다.
‘아직은 아니지. 작품을 투고할 수준이 아니란 말이야. 편집부에 원고도 보내지 않았는데 내 글이 어찌 발표된단 말인가. 두고 보라지. 내가 원고를 보내면 바로 발표될 것이니.’
나는 이렇게 자신을 위로해가면서 내 문학의 꿈을 포기하지 않고 더 열심히 했다. 이제 잔소리를 하던 아버지도 계시지 않아서 더 이상 닥달을 할 사람도 없었다.
그렇게 10년이란 세월이 흐르면서 나의 문학나무에는 문학의 열매가 달리지 못했다. 대신 우리 집 마당의 능금나무와 자두나무는 해마다 과일의 산출을 더해갔다. 우리가 고향을 떠날 때 쯤 두 나무는 몇광주리의 능금과 자두를 맺었는데 어머니는 그걸 팔아서 생계에 보태군 했다.
(전문을 읽으시려면 아래 문자를 누르십시오.)
[책임편집:리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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