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래어, 배움과 거부의 경계에서 □ 리련화

时事   2024-11-15 15:00   吉林  
언젠가 나이 지긋한 독자분이 사무실로 전화와 나를 지명해 찾은 일이 있다.
편집할 때 외래어를 쓰지 말라는 것이였다. 그런데 아마도 말하고저 하는 취지에만 너무 집중해서 그런지 아주 격정적으로, 명령식으로 얘기하는 바람에 기분이 언짢아졌다.
당시 나는 초보편집이였고 한창 들뜬 멋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걸 승인한다. 사실 대부분 외래어는 우리 말로 순화해서 쓸 수 있다. 그러나 전체 글의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뉘앙스를 풍기는 단어는 차마 순화하지 못하겠어서 그냥 외래어를 쓴 것 뿐인데… 례를 들어서 레스토랑에서 스테이크를 미듐으로 굽어달라고 했다는 문장에다 “서양식 음식점에 가 소고기구이를 5할로 구워달라고 주문했다.”고 순화하기는 너무 촌스럽지 않은가?
독자분의 취지는 좋았으나 통화 첫시작부터 거두절미하고 지적‘질’을 하는 바람에 나도 언성이 높아졌고 결국 나는 “요즘 시대가 어떤 시댄데, 사전을 찾아서 학습하세요.”라고 톡 쏴버리고 말았다.
그것이 발단이 되여 그분은 당장 사무실로 찾아오겠다며 감정을 주체하지 못했다. 결국 이튿날 사무실로 진짜 찾아왔지만 내가 마침 취재차 자리를 비우는 바람에 마주치지는 못했고 사무실 동료들이 접대했던 일이 있다.
우리 일상 속 외래어 사용은 이제 너무도 흔해져서 한 문장에 한두개쯤 섞여 들어가는 게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이를 둘러싼 세대간의 시선은 아직도 갈린다. 적극적으로 외래어를 사용하는 군체가 있는가 하면 외래어 사용에 대해 못마땅하게 여기며 그것을 거부하는 군체도 있다.
그 원인은 우리의 문화와 언어가 발전해온 방식과 관련이 깊다고 생각된다. 젊은 세대는 열린 정보의 시대에 태여나 앞선 기술과 글로벌 문화의 영향을 받으며 자랐다. 인터넷과 미디어를 통해 전세계의 정보를 발빠르게 접수하는 과정에서 외래어는 더 이상 이방인의 언어가 아니라 일상과 밀접한 단어들로 자리잡았다. 반면 어르신들은 그렇지 못하다. 더우기 나이가 든 후에 접하는 외래어는 무언가 생소하고 어쩌면 우리 언어의 본질을 흐리게 만드는 요소로 여겨질 수밖에 없다.
외래어를 거부하는 리유는 언어적 거부감 뿐만 아니라 심리적 거부감도 큰 비중을 차지하는 듯 싶다. 외래어가 어려워서가 아니라 고유한 것에 대한 고집인 것이다. 우리가 쓰던 원래 단어를 제쳐두고 굳이 외래어를 쓴다는 것은 새로운 변화와 적응을 의미한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변화에 적응하는 것이 쉽지 않은 건 인간의 본성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변화하고 있다. 세계가 하나로 되고 있고 지역과 지역 사이 장벽이 모호해졌으며 문화와 문화도 뒤섞이고 있다. 발 빠른 발전과 더불어 신생사물이 많이 생겨나면서 우리 문화생활권에서 미처 이름 지어지지 못한 사물이나 현상에 대해서 우리는 손쉽게 외래어 명칭을 가져다 쓴다. 그것을 외래어라고 거부한다면 그것은 단순히 언어문자에 대한 거부가 아니라 그 신생사물 자체에 대한 거부라고 볼 수 있겠다.
모든 세대가 외래어를 사용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피해졌고 그로 인해 어떤 분야에서 세대간의 소통 장벽은 더욱 높아졌다. 젊은 세대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많은 외래어들이 어르신들에게는 매우 낯설고 때로는 불편하게 느껴진다. 이로 인해 세대간의 소통은 점점 더 어려워지며 언어적 단절이 발생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외래어에 대한 반감을 무작정 비난할 수 있을가? 어쩌면 그들에게 외래어란 단순히 낯선 단어가 아니라 자신의 세대와 문화에 대한 자긍심과도 련결된 문제일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그들이 외래어를 거부하는 데서 오는 불편함을 단순히 ‘구시대적 사고’로 치부해서는 안될 것이다.
우리에게는 모두가 함께 사용하는 언어를 리해하고 받아들이기 위한 배움의 자세가 중요하다. 어르신들의 거부와 질문을 존중하고 새로운 외래어의 보급에 신경을 써야 할 것이다. 서로 다른 립장을 리해하고 서로 소통하려는 노력은 세대간 화합을 이루는 중요한 시작이 될 수 있다. 모든 세대가 외래어를 무리하게 받아들여야 할 필요는 없겠지만 서로의 언어를 리해하려는 마음가짐은 분명히 필요하다.
언어는 그 자체로 문화와 정체성을 담고 있지만 언어의 변화 역시 시대와 함께 흘러간다. 외래어를 거부하거나 무조건 받아들이는 극단적 태도보다는 외래어의 유용성과 한계에 대해 고민하고 세대간의 소통을 원활하게 할 수 있는 방향을 모색하는 것이 중요하다. 결국 외래어를 둘러싼 론의는 단순히 단어사용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조화로운 사회를 만들어나갈 것인지에 대한 깊은 성찰을 필요로 한다.
언어는 소통의 도구이다. 모두가 함께 써야 비로소 진정한 구실을 한다.


来源:延边日报

初审:南明花

复审:郑恩峰

终审:金星光

延边日报
연변일보 위챗 서비스 계정
 最新文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