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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계진출기회 마다하고
제3화 학자출신의 리정문 선생님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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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변대 재학시절이던 1981년 6월부터 연변일보에서는 주경화(朱京和), 김영택(金永泽) 기자님들의 노력으로 “청사에 길이 빛날 조선족혁명선렬들” 전문란을 설치하고 나의 정리로 된 겨레 항일렬사들을 련재하기 시작하였다. 이 전문란에 내가 정리한 항일렬사 20여 명이 련재되였는데 이해 6월부터 9월까지 기간에만도 조선족항일렬사 5명이 소개되였다.
40대 초반에 이른 우리 조문학부 리정문선생님은 자기 일처럼 기뻐하시면서 조문학부 학생으로서 이 정도에 이른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라며 격려하여 주시였다. 그때 선생님은 조문학부 출신이 조선족 력사를 연찬하는 것은 좋은 일이며 조선족 력사를 글로 세상에 널리 알리는 우세가 있다고 긍정하시였다. 제자로서의 나에게는 이 말씀이 보이지 않은 무형의 힘으로 되였다.
그때 리정문선생님은 현룡순(玄龙顺)선생, 허룡구(许龙九)선생과 더불어 “조선족백년사화” (전3권)를 편찬하고 계셨다. 선생님의 알선과 현룡순, 허룡구 등 세분 선생님의 전폭적인 지지로 조문학부 학생인 나도 연변의 “추수춘황투쟁”과 “쏘베트정부와 인민혁명정부” 두편 력사이야기를 정리하게 되였다.
1982년 2월과 3월의 일이였다. 그해 6월에 “조선족백년사화” 제1집이 현룡순, 리정문, 허룡구 편저로 료녕인민출판사에 의해 출판되였는데 선생님이 쓴 력사이야기 “동북의 벼농사”, “시인 김택영(金泽荣)”, “ ‘남사’의 조선족시인 신정”(南社,申柽), “20세기초 조선족의 사립학교교육”, “조선족들이 꾸린 간행물”, “운남강무학교의 조선족청년들”(讲武), “청산리섬멸전” 등 7편이 제1책에 수록되였다.
20세기 초엽에 중국에서 활동한 우리 시인이고 독립운동가들인 김택영, 신정을 이 땅의 겨레사회에 소개하기는 선생님의 글이 처음이다. 운남강무당 소개를 통하여 그 시절 양주평(杨周平)으로 알려진 양림을 소개하기도 선생님의 글이 처음이다.
“조선족백년사화” 제2집도 료녕인민출판사에 의해 현룡순, 리정문, 허룡구 세분 선생님 편저로 1984년 4월 출판되였다. 제2집에는 리정문선생님의 글로 “조선족전사 남창봉기에 참가하다”, “광주봉기에 참가한 조선족전사들”, “동북항일유격대에서의 조선족들의 활동”, “젊은 기병대장”, “ ‘연길폭탄’에 깃든 이야기”, “설산초지를 지나서”, “항일련군의 녀선동가” 등 7편이 실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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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정문선생님은 1961년 9월에 연변대학 조문학부에 입학한 제13기 생이고 학교학생회 부주석으로서 지난세기 20년대 중국 남방땅에서 활동한 조선족 혁명가들의 장거—남창봉기와 광주봉기를 이 땅의 겨레사회에 처음으로 알리였고 홍군장정길에서의 양림을 한편의 전문 소개로 처음 알리였다. 제2집에는 나의 글 “추수춘황 투쟁”과 “동만의 인민혁명정부” 두편도 올랐는데 이 두편의 글을 두고 나의 일기도 여러 편이다.
1981년 4월 2일
“정부” 초고를 오늘에야 끝냈다.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다. 큰 부담을 덜었다. 인젠 이 봄에 마음껏 기지개를 펼수있게 되였다.
1981년 4월 3일
“정부”를 원고에 올렸다. 모진 심혈을 쏟은 “정부” 원고는 오후 “전교문명례모월 총화대회”에 참가하고 나니 시간도 지나고하여 시름놓고 쉬였다. 관련 선생님을 찾아 원고를 맡겼다. 마음에 들겠는지 근심된다.
1981년 5월 17일
저녁무렵에 김진용선생을 찾아 두 원고 관련 “조선족백년사화”에 대해 문의하였다.
1981년 6월 4일
시내로 나가다가 반의 친구를 만났다. 김진용선생님이 찾더라기에 도로 돌아왔다. 은근히 근심했더니 나의 사화 두편을 정식 원고지에 올리라고 하신다. 우리 조문학부 현룡순 주임선생님께서 직접 손을 대서 수개하셨다고 한다. 나는 심히 감동되였다. 얼마나 심혈을 들인 원고였던가. 나의 땀방울이 이 분야에서 반짝반짝 빛을 뿌릴수만 있다면 만족이겠다.
이 몇편의 일기들을 보면 두편 원고의 정리와 “사화” 책으로의 오름이 두루 알려진다. 그때 연변조선족자치주 당위 선전부장으로 사업하시던 리정문선생님은 “조선족백년사화” 제2책의 출판을 두고 나의 두편의 글도 올랐다면서 그 바쁜 겨를에도 축하의 말씀을 잊지 않으셨다. 그 축하의 말씀이 참으로 고마왔다.
길림신문사를 현지지도하는 리정문 은사님 (사진자료)
그후 “조선족백년사화” 전3권은 한국의 거름출판사에 의해 4권으로 다시 출판되였다. 나는 한국에서 출판한 책은 보지 못하고 한겨레신문 1989년 2월 3일자와 2월 9일자 기사를 보고 알게 되였다. 2월 9일자 한겨레기사는 “조선족백년사화”를 두고 “80년대 중국 연변에서 이루어진 사연구 가운데 주요성과의 하나로 꼽히는 ‘조선족백년사화’는 자칫 딱딱하고 따분하기 십상인 역사를 알기쉽고, 읽기 쉽게 이야기체로 풀어 썼다.”고 높이 평가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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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큼 연변대학 시절의 리정문선생님은 중국조선족 력사, 더우기 관내활동력사에 조예가 깊은 분이였고 관내 중국혁명사속 조선족 력사연구의 개척자와 제1인자였다.
일찍 중화쏘베트공화국 로전(劳战)위원회 참모장, 홍군 제23군 군장, 홍군 제1방면군 제1군단 참모장, 중앙혁명군사위원회 총병참부 참모장으로 활동한 양림에 대해서도 그러하다. 리정문선생님은 “조선족백년사화” 제1집과 제2집내 운남강무당(讲武堂)과 홍군장정길을 통하여 양림을 품위있게 다루다가 중문으로 된 “길림혁명영렬” (吉林革命英烈,길림인민출판사, 1982년 5월 출판)에서 연변대 박창욱(朴昌旭)교수와 두분의 이름으로 양림전기를 발표하여 양림전기의 첫 정리자로 나섰다.
선생님은 그후 조선글로 된 “조선족혁명렬사전”(제1집, 료녕인민출판사, 1983년 11월 출판)에 양림전기를 본인의 이름으로 올리여 이땅의 겨레사회 양림전기의 시원을 열어놓았다. 그뒤 여기저기에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양림전기가 실리기는 하였지만 모두가 리정문선생님의 양림전기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학술연구에서도 리정문선생님은 깊은 조예를 보이였다. 필자가 알고있는 1981년과 1982년의 선생님의 학술성과를 보면 1981년 제3호 “연변대학학보” (철학사회과학판)에 “조선인민의 마음속 로신” (鲁迅在朝鲜人民的心中)을 발표하고, 1982년 제2호 “연변대학학보”(사회과학판)에 “ ‘강화’와 해방전쟁시기 조선족문예” (‘讲话’与解放战争时期的朝鲜族文艺)를 발표하였다. 1982년 그해 제4호 “연변대학학보” (사회과학판)에는 “20세기초 조선족 창가탐구” (二十世纪初朝鲜族唱歌初探)를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로신과 조선인, 해방전쟁시기 조선족문예, 20세기초 조선족 창가탐구”를 학술론문으로 다루기는 리정문선생님의 론문이 처음인줄로 안다. 그 가운데서도 로신과 조선사람은 1981년 10월호 “연변문예”에 실리기도 하였는데 리정문선생님은 중국과 한국을 망라하여도 로신을 만난 조선사람을 다룬 첫 학자로 알려진다.
선생님은 “연변문예”에 실은 “로신과 조선사람” 소개에서 “로신선생과 래왕하였던 조선 벗들이 구경 얼마나 되는지 알수 없으나 필자는 리우관(李又观), 김구경(金九经), 류수인(柳树人), 리륙사(李陆史) 등 네분을 확실히 알고있다”고 밝히였다. 그전만 해도 세상 사람들, 더우기 이땅의 우리 조선족사회는 로신과 조선사람 관계를 거의 모르고있었다.
저명한 조선족 작가 김학철선생과 함께 (사진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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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에서 언급하여 보는 리정문선생님의 우리 력사 글들과 학술성과는 내가 알고있는 선생님 연구성과의 일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지금으로부터 40여년 전 연변대 조문학부 시절의 일로서 나는 선생님의 모든 연구성과를 다는 알지 못한다. 그러함에도 연변대 조문학부 시절의 리정문선생님은 학자출신의 선생님으로 되기에 손색이 없는 분이시다. 지금도 나는 리정문선생님께서 만일 정계에 나서지 않았더라면 이 땅의 조선족 력사연구의 권위학자, 관내 조선족 력사연구의 권위학자로 뜨르르 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본다.
선생님은 관내의 우리 민족의 력사는 물론 이 땅의 해방전쟁력사도 조선족사회에 널리 알린 분이기도 하다. 선생님은, 력사는 소수의 연구가의 손에서 손으로 넘어가는 좁은 분야의 력사가 아니라 이 땅의 우리 겨레가 자기 민족의 혁명사를 널리 알아야 한다면서 그 시절 우리 글 신문인 “흑룡강신문”에 오래동안 겨레의 해방전쟁 력사이야기를 련재하기도 하였다. 그 력사이야기는 동북의 해방전쟁으로부터 남녘땅 해남도 해방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이어져 해방전쟁과 조선민족을 알리는데 크나큰 기여를 한 거사였다.
리정문선생님은 이같이 우리 민족 력사에서 일가견을 가진 학자출신의 선생님이셨다. 강사로서의 선생님의 과목담당은 조선족문학사이고 우리 78년급 시간배치는 우에서처럼 말그대로 제8학기로 되여있었다. 그런데 기억에는 제8학기로 믿어지지 않으며 그시절 1982년 2월부터 7월까지 일기책에도 조선족문학사 언급이 보이지 않는다.
이 글을 쓰면서 동반동창인 연변대 리민덕(李敏德)교수와 통화하니 마지막 학기가 아니고 앞선 학기일거라고 튕겨준다. 선생님께서 1981년 10월부터 연변대학 당위 선전부 부부장(그뒤 부장)으로 넘어갔으니 조선족문학사 강의를 7학기라 하면 맞을것 같다.
어찌하든 선생님의 강의는 짙은 흥미를 자아냈다. 광복전 문학부분 강의가 보다 그러하였다. 시인이고 독립운동가들인 신정이며 김택영이며, 문학가이고 력사학자인 신채호(申采浩)며, 한때 연변에 삶의 터전을 잡았던 최서해(崔曙海)며 강경애(姜敬爱)며, 조선족문학의 개척자의 한사람인 향토소설가 김창걸(金昌杰)이며 거의 모두가 나의 마음을 파고들었다. 한데서 나는 선생님 댁을 수시로 찾아 교류를 가지였고 보다 돈독한 정을 나눌수가 있었다.
행복한 일가 (사진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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