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계진출기회 마다하고] 제2화 연변일보사 기자로 뛸 때 (리광인)

文摘   2024-11-22 05:58   吉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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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계진출기회 마다하고

제2화 연변일보사 기자로 뛸 때

이태 사이 연변일보 청사를 배경으로 기념사진 남겨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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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6월 나는 소원성취하여 당보인 연변일보 편집기자로 뛰게 되였다. 그때 일보사 정치교육부 사무실은 지금의 연변일보사 서쪽가 연변농업은행 청사 바로 뒤 긴 단층집 서쪽켠에 자리잡고있었다. 정치교육부 옆칸은 일보사 문예부이고 단층집 동쪽에 “지부생활” 편집부가 자리잡았다. 정치교육부와 문예부는 사이벽에 자그만한 간이문을 내고 전화 한대를 같이 쓰고있었다.

대학가기 전 광평농장 시절부터 인생꿈의 하나였던 기자생활, 나는 종내 그 꿈을 이루고야 말았다. 70년대 중반 연변일보 통신원 시절 연길로 가자 선참 연변일보사를 찾아 기념사진을 남긴 나였다. 그 꿈이 현실로 펼쳐지면서 장백산 아래 시골농장의 한 젊은이가 자치주 수부 연길의 연변일보사 기자로 뛰니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다. 처음에는 교육면 기자를 맡아보다가 법제기자로 넘으며 종일 뛰여다니며 취재하고 기사를 써도 힘드는 줄 몰랐다. 청춘의 힘이 부쩍부쩍 솟아 올랐다.

그 가운데서 신문에 실린 큼직큼직한 법제기사만 해도 “렬차에서 벌어진 생사박투”, “그는 어찌하여 갑자기 죽었는가?”, “흉수는 양오빠였다”, “택시에서 벌어진 생사박투” 등으로 륙속 실리면서 사회반향이 엄청 좋았다. 독자들은 우리 “연변일보”가 볼거리가 있다면서 연변일보 관심도가 부쩍 올라갔다.

야경으로 보는 연변일보 청사

그래도 우리의 빛나는 항일사는 내버려 둘수 없었다. 나는 정치교육부와 일보사 편집부의 지지하에 연변대 재학시절 나의 련재 기사를 위해 설치하였던 “청사에 길이 빛날 조선족 혁명선렬들” 전문란을 다시 회복하여 내가 직접 맡아나서는 한편 경우에 따라 “항일의 발자취”, “력사를 더듬어”, “교육사화” 등 전문란을 새로 앉히였다. 원고는 조직하기도 하고 내가 직접 기자이름으로 쓰기도 하였다. 기자 이름으로 쓴 나의 글 “약수동을 찾아서”, “봉림동아 말하라” 등 적지 않은 글들은   지도적 의의를 가지기도 하였다. 그와 같이 짧디짧은 2년사이 많고많은 우리 항일사 원고들이 실리여 우리 력사 알리기가 자못 활발하였다.

그때 나는 연변일보사의 추천으로 연변 주당교에서 위임받고 꾸리는 청년간부양성훈련반에 참가하였다. 같은 훈련반 학원으로는 나또래 연변예술학원의 김성삼 젊은 선생과 연변작가협회의 녀류작가 리선희 등이였다. 더불어 나는 연변청년련합회 상무위원으로 뽑히였다. 정말 앞길이 창창하던 시절이였다.,

그러던 1985년 경의 어느날, 연변일보사 편집기자로 뛰다가 자치주 당위 선전부 선전처에서 사업하는 김영택처장이 일보사 정치교육부에 와서 나를 찾았다. 김처장은 지금 주위선전부에 사람이 수요되고 당신의 대학은사님 리정문부장이 당신을 지명한다면서 나의 의향을 물었다. 리정문선생님이 부르시고 귀도 솔깃한 일이였다.

그러나 멧새가 콩밭으로 한다고 나한테는 마음흐르는 곳이 따로 있어 고맙기는 하지만 응할 수는 없다고 대답을 주었다. 그후 김처장은 나를 다시  찾으며 리정문부장의  뜻을 분명히 알리였다. 그래도 나는 확답을 주지 않았다. 정계진출이 아닌 학자형 학술연구가 나의 확고한 뜻이였다.

그랬더니 김처장은 “당신이 앞으로 후회할거요!” 라고 하면서 생각을 돌리면 다시 련계하라고 하였다. 리정문선생님과 이어지는 정계진출의 또 하나의 인생갈림길이였다. 이 인생갈림길에서 정계진출이 아닌 우리 력사연구를 택했으니, 전자의 길을 택했더라면 나의 인생길은 정계진출로 쫘악 나아갔을 테고. 그래도 나는 조금도 후회하지 않는다. 나로 볼때 그번 두번째 정계진출의 기회를 마다한 나의 선택은 옳았다고 생각한다.

연변대 입학전 70년대 중반 연변일보사를 찾으며 기자 꿈을 꾸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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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왜 주당위선전부 리정문부장을 선생님이라고 친절히 부를가, 여기에는 리정문선생님과 어울리는 나와의 이왕지사가 있으니 어느덧 오래 전 연변대학 조문학부 재학시절의 일이다.

대학 재학시절에 나에게는 스스름없이 어울리며 존경하는 선생님 몇분이 계셨으니 그 가운데의 한분이 리정문(李政文)선생님이시다. 연변대학 조문학부 제13기 생이고 학교 학생회 부주석이였던 리정문선생님은 그 시절 조교로,  강사로, 연변대학 당위 선전부 부부장, 부장으로 뛰는 40대 초반의 한창 나이였다.  우리가 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연변조선족자치주 당위 선전부장, 부서기로, 길림성인대상무위원회 비서장, 부주임으로 계시여 우리 제자들의 자랑이였다.

1978년 10월에 나는 소원성취하여 연변대학 조문학부 78년급 학생으로 되였다. 나라의 대학입시제도가 회복된 후의 두번째 입학생으로 하늘의 별이라도 딸 것만 같았다. 시를 지향하다가 소설쪽으로, 그것도 우리 민족의 력사를 집대성한 장편력사소설 쪽으로 흐르게 되였으니 과외생활의 일과는 이 땅의 겨레항일운동사 공부였다.

1980년 7월 연변대 재학시절 연변대학 휘장을 달고 할빈의 "동북렬사기념관"을 찾아서

1980년7월 여름방학에는 자비로 할빈의 “동북렬사기념관”을 참관하고 기념관의 주요 렬사인물로 등장한 김순희(金顺姬)렬사를 찾아 화룡현 약수동 현지답사길에 올라보았다. 1981년 2월과 3월 두달 사이에는 약수동, 서성, 화룡, 룡정 등지에서만도 10여명 항일투사 분들을 방문취재하게 되였다.

우리 항일운동사로 향한 나의 거동은 리정문선생님과의 만남의 계기로 되였다. 1981년 3월 4일 나의 일기에는 오늘 “우연한 관계로 리정문선생을 처음으로 뵙게 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날 선생님께서 “동무가 리광인이요?”하며 반갑게 만나주시던 정경이 지금도 생생히 떠오른다.

우리 78년급 4년 과목배치를 보면 리정문선생의 강의로 된 “조선족문학사”는 제8학기(1982년 2월부터 7월까지)에 배치되여 나는 조문학부 입학 1년이 넘어도 리정문 선생님을 모르고있었다. 그러다가 조선족문학사 강의에 앞서 선생님을 만나게 되여 나는 한량없이 기뻤다.

그 시절 조문학부 강사인 리정문 선생님은 연변대학 뒤언덕 소나무밭아래 길게 늘어선 기숙사식 단층집 한칸에 거처하셨다. 그때 40대 초반인 선생님은 조문학부 동반동창인 부인 한금옥 선생님과 나어린 아들딸 네식구가 통칸으로 된 단층집에서 생활하고 계시였다.

모교 연변대학의 한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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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자주 만나게 되면서 나는, 선생님은 연변사람이 아닌 길림 부여사람이고 조문학부 출신으로서 오래동안 도문에 자리잡은 연변고무공장 로동자, 선전간사 등으로 근무하시다가 1978년 9월부터 연변대 조문학부에서 교편을 잡게 되였음을 알았다. 또, 조선족문학사를 준비하는 기간  국내 허다한 지방을 답사하며 관련자료를 널리 수집한데서 이 땅의 관내 우리 민족 력사에 대해 연박한 지식을 갖고있음도 알게 되였다.

사제간을 뛰여넘는 서로간의 공동언어로 하여 나는 선생님의 단층집을 비롯하여 때도 시도 없이 리정문 선생님을 찾을수가 있었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선생님한테서 겨레 홍군장령인 양림(杨林)이야기를 처음 듣게 된 일과 20세기 20년대 중반의 남창봉기와 광주봉기, 더우기 광주봉기에서 200여명의 조선인혁명가들이 쓰러졌다는 비장한 이야기, 2만 5천리 장정에 양림, 무정 (武亭)등 10여 명 겨레혁명가들이 참가한 이야기라 하겠다.

연변대 조문학부 시절 리정문 은사님한테서 처음 양림이란 겨레 홍군장령을 접하고

그때부터 양림과 남창봉기, 광주봉기, 홍군장정이 마음속에 뿌리를 내렸으니 참으로 잊지 못할 감사한 일이였다. 후일 나는 정말 꿈이 현실로 되여 양림평전과 무정평전의 저자로 되였다.

리정문선생님과의 인연은 이제 뒤편에서 계속 이어가면서 자상히 소개하지만 연변일보사 기자로 뛴 후 주당위 선전부로의 부름은 응하지 못하였다. 선생님께 미안한 일이지만 어찌할수가 없었다. 그후 볼라니까 연변텔레비와 연변방송국에서 리흥국(李兴国)씨와 한영철(韩永哲)씨가 주당위 선전부로 전근되였다. 한영철씨는 후에 하해(下海)한 것 같고 리흥국씨는 주위선전부에서 처장으로 활동하다가 연변텔레비방송국 국장, 연변심계국 국장, 연변조선족자치주 당위 선전부장 등을 력임하였다.

지금도 1985년 그 시절 리정문부장의 주당위 선전부로의 부름을 상기하면 마음이 후더워난다. 선생님은 나를 잊지 않으셨고  나를 직접 불러 주시였다. 그 부름에 응하지 않은 것이 내내 마음에 걸리고 죄송하기도 하다. 선생님과의 인연에서 유일무이하게 선생님의 부름과 뜻을 거역한 미안한 처사였다.

그러면서도 후회하지는 않는다. 이 땅의 조선족력사로 향한 연구의 삶이 나의 인생목표이고 드팀없는 신념이였으니 나는 시종 마음을 흐트리지 않고 이 소신을 안고 뚜벅뚜벅 한길 만을 걸어왔다. 이 한길 속에서 연변대학 시절의 리정문선생님의 꿈, 선생님과의 약속, 선생님의 바라는 뜻을 실천하여 왔다.

평전 "홍군장령 양림"을 집필, 출판하면서 황포군관학교 교관시절 양림의 또 다른 사진 한장을 찾아 내고 

2024년 9월 2일 재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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