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계진출기회 마다하고] 제1회 뜻밖에 들이닥친 두 찦차 (리광인)

文摘   2024-11-18 07:31   吉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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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계진출기회 마다하고

제1화 뜻밖에 들이닥친 두 찦차


대학졸업후 화룡현위 당사연구실 시절 현위판공실 기념사진
세번 정계진출기회 마다하고
젊음이 싱싱하던 지난 70년대 화룡현광평농장(1971 ~1978) 시절 나의 최대소망은 일찍 입당하면서 정치발전의 길을 걷는 것이였다. 정치간부로 성장하는 길이다. 그러다가 뜻하지 않은 두차례 곡절과 억울한 사건을 겪다가 연변대학에 입학한후로는 이 소망이 바뀌우게 되니, 우리 민족의 력사연구, 더우기항일사연구가 맘속깊이 자리를 잡으면서 드팀없는 인생목표와 신념으로 뿌리를 내리였다.
그러던 나에게, 누구에게나 인생에 세번의 기회가 온다고 하더니만 한생이 아닌 청춘의 한철에만 휘황한 기회가 세번이나 닥쳤으니,  바로 나의 드팀없는인생목표와 신념과 확연히 다른 세번의 정계진출의 기회, 그로하여 나는 인생의 갈림길에서 잠시나마 고민한 적도 없지 않다.

정계진출을 포기한 시절의 정계진출 기회였으니 이같은 정계진출의 세번 기회  이야기는 나의 가까운 친구들이나 지기들도 거의 모르는 나만의 이야기로 남아있다. 리정문선생님(원 연변 주당위 선전부장, 부서기, 성 인대부주임 력임) 추모글에서 세번의 기회중 하나의 기회를 밝힌바는 있지만“리정문기념문집”에만 오른데서 사람들은 거의 잘 모르고있다.

하다면 나의 인생길 젊은시절에 주어진 정계진출의 세번 기회는 어떤 이야기일가, 또 이 세번 정계진출의 기회에도 마음 드놀지 않고 접으면서 확고부동하게 우리 력사연구의 길을 인생목표로 고집하며 걸은 이야기는 어떠했을가, 오늘부터 몇회에 나누어 그때 그 시절 80년대 대학졸업후의 진실한 이야기를 털어놓게 된다. 이 글을 읽노라면 주어진 인생목표와 신념이 얼마나 강한가를 그대로 들여다 볼수가 있다.

아래 몇편의 글속에 그 진실한 이야기가 묻어 나온다. 여러분들의 진지한 왕림과 조언을 기대하여 본다.필자주

【제1회】뜻밖에 들이닥친 두 찦차
1

지난 2024년 7월 24일과 25일 스핀호ㅡ“조선족발자취”에 지난 80년대 연변일보사 편집기자 시절 사진과 연변력사연구소 시절 사진을 올려 열성적인 지지와 성원을 받았다. 생각밖이였다. 력사연구소 시절 사진은 모두 여섯 점으로 편집되였는데 그중 세점속에  당년 연변력사연구소 소장으로 활동하던 한준광어른도 우리와 자리를 같이했다. 두편의 스핀호를 다시다시 보노라니 연변일보사 시절과 더불어 력사연구소 시절이 떠오르며 한준광소장이 더욱 그리워난다.

연변력사연구소 원 소장 한준광 어르님(좌1)
한준광소장님은 나를 조선족력사연구에로 직접 손잡아주시며 나의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주신 분으로서 두고두고 잊지 못한다. 

1982년 7월 연변대학 조문학부를 졸업한후 나는 졸업배치가 순조로이 풀리지 않아 고향 화룡으로 환고향하여 조직의 배려로 현위 당사연구실에 출근하고있었다. 당사연구실은 화룡현의 당조직사와 항일사 연구에서 리상적인 일터로서 나는 낮과 밤이 따로없이 분망히 보내고있었다. 그 가운데서 현위와 현정부의 수요로 현빈관 회의실에서 화룡현혁명투쟁사 전문 강의를 하게 되였다. 강의고가 없이 몇가지 요점만 적은, 말로하는 순수 이야기 형식이였다.

넓고 길다란 회의실에는 현위와 현정부의 관련인원들로 차고 넘치고 강의는 두세시간 지속되였는데 내가 강의를 이어가는 말소리 외 시종 조용한 분위기로 흘렀다. 현위 판공실에서는 현위와 현정부에서 가지는 간부회의들도 회의가 시작되여 얼마쯤 지나면 회의장이 도처에서 웅웅하는데 오늘 강의는 력사강의임에도 떠드는 사람 거의 없다며 탄복해마지 않았다. 그 영향이 대단히 좋았다.

당년 화룡현 빈관 모습 (사진자료)
그번 강의를 전후로 나는 현성과 현안의 여러 단위들과 중소학교들에 다니며 화룡현혁명투쟁사 강의에 나서 그 영향이 보다 컸다. 그때 나는 대학입시후 대학을 졸업하고 화룡현 현위기관에 배치된 첫 대학생이였다. 그번 력사 전문강의가 있은 후, 현위와 현정부에서는 나를 중시하며 깊은 주의를 돌리였나부다. 후에 안 일이지만 현위와 현정부에서는 나를 현의 주요 후계자대상에 넣고 양성하기 시작하였다.

2

이렇게 되기까지 1983년 11월 화룡빈관에서 옛 항일투사들과 력사의 견증자 좌담회를 성공적으로 가진 것과도 관련되는 것 같다. 그번 좌담회는 내가 발기하고 당사연구실 박정복주임과 현위의 전적인 지지하에서 열리였는데, 이 좌담회를 위해 나는 내가 그에앞서 한분한분 찾아 뵌 항일지사분들을 정성껏 모시게 되였다.

나는 또 화룡현 항일근거지들인 약수동과 어랑촌, 처창즈 등 근거지들을 사상 처음으로 론문형식으로 정리하여 내놓았고, 질서가 잡히지 못한 화룡현 어랑촌13용사 전후관계를 처음으로 상세히 밝히였고, 화룡현내 여러 근거지와 전적지들에 기념표지를 세울 것을 제의하여 현위와 현정부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아 후에 현실로 펼쳐졌다.

그 시절 현위 당사연구실은 처음 사무실이 없은데서 한시기 현위 라창진서기의 판공실에서 사무를 보았다. 라창진서기는 중앙당교에서 학습중이여서 마침 판공실이 비고있었다. 당사연구실은 현위 판공실과 직결되는데서 현위 판공실과 한 부문이나 다름없었다. 지금도 그 시절 현위 판공실 인원들과의 기념사진은 소중한  사진으로 남아있다.

화룡현위 당사연구실 시절 현위 판공실 분들과 함께
그렇듯 화룡현위 당사연구실 시절의 나는 생기를 넘치는 30살 정도의 한창 나이였고 앞길이 창창한 열혈청년, 현위와 현정부에 배치된, 대학입시후의 첫 대학생이였다. 이런 여러가지 상황으로 보아 현위와 현정부에서는 나를 무척 중시한 것 같다.

3

내가 한창 잘 나가고있던 어느날, 현위판공실 울안에 연변일보사 찦차가 들어섰다. 1984년 5월 경의 일이다. 뒤미처 연변력사연구소의 찦차도 들이 닥치였다. 연변일보사에서는 주경화 부주필이 오고 연변력사연구소는 한준광소장이 직접 오시였다. 한준광소장은 연변일보사 주경화 부주필이 화룡으로 출발했다는 소식을 듣고 만사불구하고 달려 온 것이였다. 현으로 말하면 일대 희한한 광경이였다. 대학을 졸업한지 2년도 채 되지 않던 시절의 일이다.

대학재학시절 연변일보사 원 부주필 주경화 기자님과 연길공원에서
그들은 현위지도자와 판공실을 찾아 현위당사연구실 리광인을 자기들 직장으로 데려가겠다며 바싹 들이댔다. 일반 직장이 아닌 자치주 수부 연길시의 현급 단위에서, 그것도 두개 정현급 단위에서 동시에 나서니 현위에서는 놀랐다. 하도나 지궂게 접어드니 현위에서는 그럼 리광인 본인의 의견을 들어보자고 하였다. 현위에서는 화룡에서 잘나가고 있는 내가  응하지 않을 것으로 보고있었다.

그러나 아니였다. 한사람의 인생에서 인생이 바뀌는 이런 일은 흔치 않는 일로서 응당 잡아야 한다는 것이 나의 태도였다. 현위에서는 “인재는 붙들어 둘수 없구나!” 라고 개탄해마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게 나는 나의 선택에 의하여1984년 6월에 연변일보사 편집기자로 전근하게 되였다. 내가 뛰여다니며 아글타글 전근이 아니라 앉아서 받들리며 자치주 수부 연길로 진출한 전근이였다.

지금처럼 연길에  살고프면 아무때고 이사하는 시절이 아니라 연길에서 직장을 찾으며 연길사람이 된다는 것은 그야말로 하늘의 별따기와 같은 시절이였다. 그것도 그 시절 사람들의 부러움을 잔뜩 받던 나라 당보의 전직 기자직업이니 어깨가 으썩해날만도 하다.

연변일보사로 전근한후 정치교육부 기자들 기념사진
사실 연변일보사 편집기자 일은 그때 처음 생겨난 일이 아니였다. 연변대학 졸업을 앞두고 연변일보사에서는 나를 지명하여 요구하면서 리광인 졸업생을 받겠다고 나섰다. 그런데 우리 78년급 조문학부 졸업배치는 연길시 배치명액에서 나를 빼서 화룡으로 넘겨 버리였다. 그렇게 할수 있은 것은 리광인으로 보아 화룡에 갔다가도 연길에 쉽게 전근할수 있다는데서였다.

억히 막히였다. 연변일보사에서 지명요구하는데도, 한사람의 인생대사에 관련되는 일터배치를 연길시 아닌 화룡으로 쳐던진다는 건 도저히 말도 안된다. 연변대학 선생들과 아무런 배경, 사회관계도 없는, 아무런 힘도 없는  시골출신 젊은이로서 졸업배치상황을 뒤짚을수도 없는 실정.

나는 별수없이 화룡으로 달려가 모교인 화룡2중에 가서 화룡2중에서 받겠다는 박경선 교장선생님의 대답을 받고는 곧추 화룡2중 시절 선생이던 연변대 정치학부 리두만 은사님을 찾았다. 70년대 화룡2중 재학시절 나는 학교지도부로부터 받들리던 학생간부여서 쉽게 대답을 받아냈다.

허나 리두만선생님의 생각은 달랐다. “연길에 배치되지 않았다하여 너무 상심하지 말고 먼저 화룡으로 가라. 화룡2중은 안돼. 교육에 가면 력사연구가 끝이지. 먼저 이 쪽지를 가지고 화룡현위 조직부 조봉덕 과장을 찾아라. 좀 있다가 연길로 오면 되지.”

화룡2중 시절 은사님이신 리두만 선생님
4

배포유한 선생님의 말씀이다. 속이 짚이는 것이 있어 그길로 화룡현위 조직부로 가서  조봉덕과장을 찾으니 그분은 조직부 간부과 과장이였다.

“음, 동무구만. 두만선생의 전화를 받았소. 우리 항일사연구에 특장이 있는 동무를 제 연구를 하도록 조건을 지어 주어야지 !”

조봉덕과장은 두말없이 머리를 끄덕이며 돌아가서 소식을 기다리라고 하였다. 그리곤 현정부 인사국 리광명국장한테 전화를 걸면서 리광인 동무의 당안자료를 교육국이 아닌 현위조직부로 넘겨달라고 부탁하였다. 이 과장님이 후일 현위 조직부 부장으로 활동하신 분이시다.

현인사국 리광명 국장도 초면이 아니다. 리국장은 화룡현 광평농장 시절의 절친인 리태섭의 아버지이고, 나 토산중심소학교 시절의 은사님 리복자선생님의 친오빠로 된다. 그런 분이 날보며 미소를 지으셨다.

“태섭이한테서 소식을 들었소. 광인이 이미 화룡2중 박경선교장과 말하여 2중에서 다른 연변대 졸업생들을 제치고 선참 광인이를  받기로 하였더구만. 안되는 일이지. 우리 항일사, 조직사 연구인재가 절박히 수요되오.”

어머님을 모시고, 리태섭 부부와 우리 부부 기념사진
“이미 연변대학의 리두만선생한테서 광인이 흔치않은 항일사인재라는 얘기 들었소. 현위 조직부 조봉덕과장과도 토의를 거치였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오. 인재는 어디에서나 빛을 뿌리기 마련이지.”

마음을 짓누르던 천만근 무게의 돌을 뿌리친 기분이다. 현위와 현정부에서는 대학입시회복후 첫 대학생인 나를 홀대하지 않았다. 인재니 조건을 지어주어야 한다면서 나를 신생한 현위 당사연구실에 배치하는 배려를 돌리였다. 사무실도 현위 판공실 바로 곁이다. 이어 연변대학 중문학부 한어전업 졸업후 룡정현 개산툰진 중학교에 배치되여 교편을 잡은 미혼녀 림선옥을 룡정현 교육국과 화룡현 교육국과의 관문을 넘으면서 화룡현 인민법원에 배치하여주었다.

연변대학 정치학부 리두만선생님께서 화룡현위 조직부와 화룡현 인사국을 통한 주도면밀한 배치결과였다. 

그렇게 나는 화룡2중 교원으로 선택되였다가 현위조직부와 현인사국에 의해 현위 당사연구실에 출근하게 되였다. 이에 굴복하지 않은 화룡2중 박경선 교장은 현위와 현정부를 찾아 우리 2중 고중졸업생인 리광인을 기어이 2중으로 데려가겠다고 수차 다니였다. 그래도 현위 조직부와 현인사국에서는 인재는 인재의 자리에 놓아야 한다면서 흔들리지 않았다. 그 시절 화룡2중이나 박경선 교장님으로 말할 때 나로서는 아주 미안한 일이였다.

당년 화룡2중 교장 박경선선생님(우1)


대학을 졸업하고 화룡현위 당사연구실에 배치된 후 연변일보사에서는 단념하지 않았다. 더우기 주경화 부주필이 더욱 그러하다. 연변대학 조문학부 재학시절에 여러가지 원고를 써서  연변일보에 발표한 것은 우리 반에서 나 혼자 뿐이였다. 주경화 부주필은 내가 화룡현 광평농장에서 겪은 억울한 사건과 시정을 연변일보에 실어주어 영향이 좋은데다가 대학 재학시절의 나의 항일렬사 원고발표를 위하여 “청사에 길이 빛날 조선족혁명선렬들” 전문란을 설치하여 그 영향이 더욱 좋았다.

그런데 대학을 졸업하면서 나를 데려가지 못한 연변일보사에서는 기회를 보다가 1984년 5월경에 화룡으로 달려와 나를 내놓으라고 졸랐던 것이다. 그렇게 내가 연변일보사로 가게 되니 이번에는 연변력사연구소 한준광소장이 속이 풀리지 않았고 이제 적당한 때 기어이 력사연구소로 전근시킨다며 나에게 일찌감치 침을 놓았다.

연변일보사에서는 연변대학 중문학부 77년급 한어전업을 졸업하고 화룡현법원에서 사업하는 안해 림선옥을 연변일보사에 함께 전근시키면서 나는 정치교육부, 안해는 시사부에 출근하도록 하였다. 그통에 넘넘 아쉬운 것은 화룡현위와 현정부였다. 현에서는 1977년 대학입시회복후 첫 대학생인 나를 현위 주요후계자 양성명단에 넣었다가 랑패를 보아야 했지만 그래도 대범하게 놓아주는 흉금을 보이였다. 미안하면서도 내내 감사한 마음이였다.

화룡현법원 시절 안해 기념사진
연길 연변일보사로의 전근을 앞두고 그 시절 화룡현부련회 장주임은 나를 보더니 “쑈리, 연길에 가서 잘하오. 현에서는 쑈리를 한다하는 인재로 키우려고 했는데 그렇구만. 현위에서는 인재를 붙들수 없다면서 리동무를  생각해서 그럼 입당하고 떠나라고까지 했다오. “라고 말씀하시면서 현의 의도를 전해 주었다. 나는 다시다시 감동되였다.

장주임의 말씀은 사실이였다. 현위와 현정부에서는 대학입시회복후 첫 대학생인 나를 무척이나 아끼였고 나의 앞길엔 오색찬란한 길이 놓이였다. 그럼에도 내가 이 오색찬란한 길을 외면하니 현에서는 자못 유감이였다. 그후 현에서는 현위 판공실 비서로 사업하는 우씨와 현위 선전부 간사로 사업하는 차씨를 중용했고 후에 이들 둘은 화룡현위와 자치주의 주요지도자의 한사람으로 각기 부임하게 되였다.

그래도 나는 후회하지 않았다. 내 인생길에서 대학 정치학부 졸업생이 아닌 조문학부 졸업생이 정계로 진출할수 있는, 인생길에 놓인 절호의 기회를 뿌리친 첫 거동이였다. 그후 연변일보사와 연변력사연구소를 둘러싸고 이같은 정계진출 기회는 두번 더 있었고 또 선후 두번 뿌리친 적이 있었다. 우리 조선족항일사 연구, 한번 먹은 이 마음ㅡ인생목표와  신념은 시종 변할수가 없었으니 이제 그 이야기가 한편 또 한편 륙속 펼쳐지게 된다.

화룡현위 당사연구실 근무시절 현위판공실 일군들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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