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수기) 추억의 사이판 (태명숙)

文摘   2024-10-07 06:07   吉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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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사이판
태명숙
   사이판은 태평양의 북마리아나 제도에 있다. 섬의 서쪽은 모래 해변이고 동쪽은 바위 절벽인데 1970년 초부터 사이판의 관광사업이 본격화 되면서 많은 관광객들이 새섬, 만세절벽, 위령탑, 동굴비치, 등 유명 코스들을 찾았다.
   서쪽 모래 해변에서 푸른 잉크를 통채로 들이 부은 것 같은 푸른 바다를 바라보면 와~하고 환성이 절로 나온다. 한 눈으로도 수평선 위의 구름과 바다가 맞물려 보이는데 마치 한폭의 수채화마냥 초보가 그냥 찍어도 작품이 되고 그림이 되는 그런 풍경이다. 

   1980년대 후반부터 사이판 노동청에서 정한 저렴한 인건비에 투자자들이 모여들었고 특히 한국에 본사를 둔 봉제 회사들이 그 작은 땅 덩어리에 많이 들어 섰다. 그리하여 중국, 필리핀, 베트남, 태국, 캄보디아, 등 여러 나라들에서 대량의 인력들을 모집했었는데 그 혜택을 나도 본 셈이다. 
   그 때 나는 시 백화점에서 옷 가게를 오픈하여 한 달에 한 두번은 물건 구입으로 연길 서시장에 갔었다. 연길에서 봉제공으로 사이판에 간 처녀애들이 돈을 잘 벌어 집에 가끔씩 보내 온다는 입 소문을 전해 들었는데 모든 정보는 연길이 더 빨랐다.
    때 마침 1992년 봄에 시 정부에서 사이판 봉제공 모집 공고가 있었다. 할빈에서 실기시험을 봤는데 첫 선발대로 6명이 합격되였다. 그 중에 나만 애 딸린 엄마였고 나머지는 20살 좌우의 처녀애들이였다. 떠나기 전에 시 정부 관계자는 우리 선발대가 가서 열심히 잘 해야 이 모집이 끊기지 않고 더 많은 인력을 보내는 계약을 체결할 수 있다고 신신 당부했다. 우리 일행은  비행기로 북경에서 한국을 경유하여 4시간 넘는 긴 여정을 거쳐 사이판 국제 공항에 도착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바닷가의 풍경이 제 아무리 아름답고 황홀했어도 우리에게는 이튿날부터 고되고 힘든 로동이 시작되여 돌아 볼 새가 없었다. 봉제회사여서 재단반, 봉제반, 완성반까지 세개 라인이였는데 운이 좋게 나는 완성반에 배치되였다. 완성반은 야근이 제일 많아 돈을 더 벌 수 있어서 모두가 욕심내는 부서라고 연길에서 간 고참 언니가 얘기해 주었다. 
    완성반은 불량품과 정품을 정확히 체크하는 정밀한 작업이다. 재단반에서 원단을 재단하면 봉제반에서 만든 옷들을 완성반에서 검사를 끝내고  마무리 작업으로 제품이 포장되여 나간다.         
    바이어가 주문한 몇 천장, 몇 만장의 물량이 컨테이너에 실려나갈 때면 밤을 새면서 연 이틀 계속해서 작업 할 때도 가끔씩 있었다. 그런 날에는 식당 언니들이 남아도는 묵은 밥으로 누룽지를 부치느라 분주하다. 왜냐하면 야참은 라면으로 떼웠지만 퇴근하면  배가 고픈 것보다 잠이 밀려 식사 한끼 쯤은 건너 뛰여도 무방했기 때문이다. 
    완성반 작업은 온종일 앉지 못하고 서서하는 부서라 발목이 항상 부었고 쪽 가위로 실밥을 따느라 손목이 무척 아팠다. 그래도 한창 젊을 때라 자고나면 괜찮아졌고 또 일하면 아프고 그런 연속이였다. 
   첫 한 달은 열대기후로 기온이 높은 탓에 적응이 안 되여 나는 늘 머리가 어지럽고 속이 울렁거리면서 자주 토했다. 다행히 사이판에도 중의원이 있어 점심 시간을 이용해 보름정도 침을 맞고 치료는 되였지만 한 달도 안 된 사이에 4키로 넘게 살이 빠졌다. 지금은 다이어트를 하려고 애를 써도 잘 빠지지 않는 살과의 전쟁이지만 그 때는 어쩐지 살이 너무 빠져 많이 속상했었다. 
   다행히 고향에서 떠나올 때 엄마가 흙 한 줌을 봉지에 싸 주었는데 그래서인지 물 탈은 없었다. 거기에 간 애들 중에 물이 안 맞아 배 탈이 나서 고생하는 애들도 가끔씩 있었다. 
   마지막 한 해는 기숙사의 안전을 책임지는 사감이란 책임까지 더해져 정말로 힘든 한해였다. 사무실에서 쭉 지켜보면서 믿고 맡기는데 거절할 수 없는 일이였다. 
   고향에서 나와 함께 떠날 때 산설고 물선 낯선 외국땅으로 어린 딸들을 보내면서 애 엄마인 나에게 잘 돌봐 달라던 부모님들의 부탁도 사감을 거절할 수 없는 이유였다. 내가 좀 힘들어도 기숙사를 위하는 일이면 애들을 위하는 일이라 생각했고 맏 언니로서 최선을 다 하리라 마음을 굳혔다.

    강우량이 많은 사이판은 물 탱크로 빗물을 받아서 샤워를 한다. 물 탱크에 저장된 많은 양의 물을 받자면 아침에 씻는 애들을 위해 남들보다 일찍 일어나 물을 틀어 놓아야 했고 저녁에 쓰는 물은 남들보다 15분 정도 먼저 퇴근해서 둥그런 큰 통에 받아 채워 놓아야 몇 백명이 쓸 수 있다. 항상 물은 준비되여야 높은 기온에 수시로 씻는데 지장이 없다.
   초과 근무가 없는 날이면 저녁 9시까지는 기숙사에 인원이 다 들어 왔는지, 방마다 체크한다. 일요일 휴식날이면 기숙사가 텅 비다 싶이 썰렁하다. 피 끓는 젊은 청춘들이라 아침 일찍부터 동굴비치와 새섬, 반자이비치와 만세절벽, 위령탑, 등 유명한 코스들을 구경하느라 서로들 시간가는 줄 모르지만 저녁 9시전에 기숙사로 복귀하는 것만은 모두가 잘 지킨다. 사감이 적어 올리는 아침 일지에 이름이 적히면 사무실에 불리워가 문책 당하는 것 쯤은 모두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사면팔방 바다를 끼고 있는 섬인 사이판에는 익사 사고가 빈번히 발생한다.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고 모두의 안전을 책임지기 위해 사감은 수시로 기숙사 인원을 확인하고 바닷가로 나가는 애들에게 당부의 말도 잊지 않는다. 
    한 가정을 놓고보면 사감이란 엄마의 역할이다. 남들보다 덜 자고 일찍 일어나 생리통이나 그 어떤 사정으로 출근하지 못하는 인원과 전 날 저녁에 체크한 명단을 적은 일지를 사무실에 올린다. 기숙사의 깨끗한 환경을 위해 대 청소를 조직하는 것도 사감이 해야 할 일이다. 
    지금 생각해도 회사일과 사감까지 그 힘든 상황을 어떻게 그렇게도 잘 버텼는지...돌이켜 보면 사이판에서의 적응기는 지금 한국에서 그 어떤 역경에서도 잘 버텨가는 밑거름이 되지 않았을까? ”젊어서의 고생은 금을 주고도 사지 못한다” 는 속담이 생각난다. 

    사이판의 기온은 얼마나 뜨거운지, 바닷가에서 몇 시간만 수영해도 햇빛에 그을러 피부가 새까맣게 타고 했지만 그래도 유일하게 나의 마음을 달래준 은 싸락 같은 모래위에 또박또박 발 자국을 남기면서 걷던 해변길이 고맙기만 하다. 휴일이면 바닷가에 나가 끝없이 펼쳐진 해변가를 걸으면서 잠시나마 집 떠난 그리움을 잊고 피로에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면서 저 멀리 멀어져가는 고깃배를 하염없이 바라보면서 멍을 때리기도 했던 30여년전 추억이 새록새록 머리속을 스친다.
   일이 힘든 것은 다 참을 수 있었지만 야근이 없을 때는 고향에 두고 온 애들 생각에 잠 못 이룰 때가 많았고 이불속에서 울 때도 많았다. 나 자신은 힘들게 일하고 있지만 내 딸 만큼은 육체적으로 힘들지 않길 바라는 엄마의 마음에서 첫 봉급을 인편으로 고향에 보낼 때 딸에게 영어를 전공하면 어떻겠냐고 부탁했다.
   2년 계약이 완료된 시점에서 다른 애들은 연장을 했지만 난 애들 때문에 귀국했다. 그 후로 시 정부는 우리가 일했던 사이판 회사와의 로무계약이 계속 체결되였다. 몇 년후에 국제무역 회사에서는 사무실 조리로 영어를 전공한 능력있는 처녀애 한 명을 채용했었는데 많은 경쟁자 중 딸이 합격되면서 딸도 내 뒤를 이어 사이판에 가게 되였다. 
    다행히 딸은 나처럼 힘들게 일하지 않고 사무실에서 업무를 보게 되였다. 딸은 세관에 가서 바이어가 주문한 미국에 나가는 제품을 영어로 서류를 작성해서 내 보내는 업무를 맡았다. 또 회사 직원들의 급여도 나눠주고 아프면 병원도 데려가고 ....하여튼 배운 영어를 유용하게 써 먹고 실천속에서 더 많이 배우면서 봉제공보다 월급도 많아 일거 양득이였다. 
    거기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휴가차 고향에가 결혼식도 올렸고 또 다시 사이판에서 출산도 하게 되면서 한국에 있는 나한테 초청장을 보내왔다. 그리하여 2002년 봄에 나는 딸의 산후조리를 위해 또 다시 두 번째로 사이판 땅을 밟게 되였다. 

    십년이면 강산이 변한다지만 태평양 바다의 보석같은 섬으로 알려진 온화한 기후와 천혜의 자연환경이 그대로 보존된 사이판, 비가 온 뒤 칠색 무지개가 비낀 푸른바다 너머로 붉게 떠 오르는 일출과 일몰의 황홀한 광경은 아직도 나에게 잊혀지지 않은 영원한 추억이다. 
   사이판에는 힘들었던 나의 한 때의 젊음과 랑만이 녹아 있다. 또 나와 딸의 잊지 못 할 추억이 있고 사랑하는 나의 손자가 태여난 고향이기도 하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사이판을 다녀 온지도 30여년이 지났다. 기회가 된다면 일이 아닌 여행으로 꼭 다시 가 보고 싶다. 
   나의 추억속 사이판으로 !
     2024. 9. 25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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