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림의 문화탐험] 두루미 그리고 달빛의 궁전

文摘   2024-10-22 09:57   吉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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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루미 그리고 달빛의 궁전

김호림

뚜르르… 하는 두루미의 울음소리가 당금이라도 이 이야기의 문을 두드릴 듯한다.

옛날 옛적에 “악사가 거문고를 연주하자 검은 학(두루미)이 목을 길게 빼면서 울고 깃을 펴서 춤을 추었다”고 전국시대의 철학자 한비(韓非)가 책에 기술한다. 당나라 때의 시인 이백(李白)은 시로 읊었으니 “천년의 오랜 나무에 흰 학(두루미)이 깃들어 춤을 추고 쏟아지는 폭포가 백 척의 다리에 무지개처럼 걸렸다”고 한다.

두루미는 그야말로 하늘과 땅 사이에 아름다운 한 점의 산수화를 그리고 있다. 까만 꺽다리가 흰 구름송이 같은 하얀 몸통을 위로 받쳐주고 붉은 정수리 부분이 하늘 위의 태양처럼 이와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이 때문에 두루미는 붉은 정수리의 학이라는 뜻의 ‘단정학(丹頂鶴)’이라는 다른 이름이 있으니 거개 단마디로 ‘학(鶴)’이라고 쉽게 부른다. 무리를 짓는 새 가운데서 으뜸가는 길상조(吉祥鳥)로 일품조(一品鳥)라고 일컬으며 푸른 소나무와 더불어 길상(吉祥)과 장수를 뜻하고 있다.

“신선이 타고 날아다니거나 지어 신선이 변신할 수 있는 신령스런 새라고 합니다.”

민간 신앙에 두루미(학)는 바로 새의 깨끗한 자연미와 동작으로 복을 빌며 푸른 소나무와 더불어 길상과 장수의 뜻을 나타내고 있다.

일찍 두루미(학)춤은 송(宋)나라 말기에 흥기하여 청(淸)나라 동치(同治),광서(光緖) 연간에 흥성하였다. 오늘날 대륙 남부의 광동(廣東) 주해(珠海) 삼조(三灶) 마을의 특유한 춤으로 구정기간에만 공연하는 재래 춤으로 알려지고 있다. 옛날 옛적에 어민들은 늘 주해의 섬 위 세 부뚜막 모양의 바위에 올라 먹고 마셨는데 이때 이곳을 ‘세 부뚜막’이 있는 고장이라는 의미의 삼조(삼조(三灶)라고 불렀으며 훗날 동네가 일떠서고 학춤(鶴舞, 두루미춤)이 생기면서 고장의 이름을 따서 삼조학춤(三灶鶴舞)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대륙의 남해 기슭에 자리하고 있는 삼조 마을은 이르는 곳마다 수림이 무성하고 갯벌이 비옥하고 기름지다. 해마다 날짐승이 무리를 지어 이곳에 날아들고 있는데 이때면 두루미도 늘 해변의 산림에 서식한다. 두루미의 몸짓, 울음소리는 번마다 하늘 아래 땅 위에 향연의 큰 무대를 펼친다.

옛날 마을의 사람들은 늘 두루미를 본 따 깃처럼 옷 모양을 하고 춤을 췄으며 두루미가 우짖듯 소리소리 노래를 했다. 두루미춤(학무, 학춤. 鶴舞)은 이렇게 현지에서 장장 700여년을 이어왔다. 이 두루미춤은 개안식(開光式), 축수, 탈바꿈(우화, 羽化) 등등 의식을 가지며 징과 북이 반주하고 이와 함께 ‘두루미의 노래’로 즐겁고 열렬하며 길상의 축제 분위기를 이룬다.

삼조(三灶)학춤, 광동성 주해의 전통춤으로 송나라 때부터 전승되었다고 한다

실제로 두루미는 수명이 60~70년으로 굉장히 길어 십장생(十長生)의 하나로 꼽히며 날아다니는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 뉘라 없이 다 좋아하는 새이다. 한편 두루미는 인간이나 사물의 아주 높은 경지를 형용한다. “학무가 구천의 구름 위에 올라서네(鶴舞九天入云霄)”에서 ‘구천(九天)’은 신화에서 신들이 살고 있는 곳을 말한다. 이 하늘에 올랐으니 신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하늘 아래 두루미의 최대 서식지인 대륙 동북부의 치치하얼(齊齊哈爾)에서 무보(無步)의 건강체조 전주(前奏)가 바로 두루미의 춤이라는 게 자못 흥미롭다. “우리는 두루미가 짝짓기를 하면서 우짖고 서로 뛰노는 것을 길조라고 합니다. 이걸 바로‘학무(鶴舞, 학춤)’이라고 말하는 거지요.” 인터뷰를 받는 현지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다들 이렇게 말한다.

두루미는 이번에는 바다를 날아 건너 반도의 저쪽 달빛의 궁전에 나타난다. 나례(儺禮)의 하나로 두루미의 탈을 쓴 무용수들이 두루미춤(학무, 鶴舞)을 추는 것이다. 나례는 섣달 그믐날 밤에 궁중이나 민가에서 악귀(惡鬼)를 쫓기 위하여 베푸는 의식(儀式)이다. 궁정의 종합적인 무악(舞樂)으로 학무(鶴舞)와 연화대(蓮花臺), 처용무(處容舞)기 잇따라 공연되는 것이다.

조선 성종(成宗, 1469~1494) 때 편찬한 악서(樂書) 『악학궤범(樂學軌範) 』의 향악정재(鄕樂呈才)에 학무(鶴舞)의 양상이 그대로 나타난다. 먼저 음악이 연주되면 박(拍)소리에 맞춰 청학과 백학이 날개를 펴고 뛰어온다. 청학과 백학은 이때 음양의 두 남녀를 상징한다. 학이 연통(蓮筒)을 둘러싸고 춤을 추다가 연밥을 부리로 콕콕 쫏으니 그 속에서 금방 동남동녀(童男童女)가 한 쌍의 꽃송이처럼 나타난다. 이에 학은 깜짝 놀라 멀찌감치 도망한다. 미구에 동남동녀는 두루미(학)을 타고 피리를 불며 하늘세계로 날아간다. 신선이 살고 있다는 그 세계인즉 다자다복을 빌고 장수를 바라는 인간 모두 기원하는 무릉도원의 세상이다… 향악정재는 고려 시대 송나라에서 들어온 당악정재(唐樂呈才)와 상대적인 개념으로 붙인 이름으로 음악을 연주하며 연행하는 노래, 춤, 기예(技藝), 음악의 종합 연희물(演戱物)을 이르는 말이다.

실제로 두루미춤(학무, 학춤)은 고려부터 궁정 의례로 행해온 궁정무이며 당·송 때 벌써 대륙에서 나타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마침 송나라 궁정의 연회나 제사 등에 사용되던 떡도 이맘때 반도에 전한다. 그때 사절단이 송나라에 다녀오면서 배워 들여왔다는 것이다. 수라상에 오르던 떡 역시 두루미춤처럼 한때 궁정의 명물이었으며 오랫동안 민간에 좀처럼 전하지 않는다. 하긴 왕궁의 많은 것은 비사(秘事)로 항간에 쉽게 알려질 수 없었다.

그때 그 시절 궁정에서 임금과 왕비, 대신이나 관원의 밥상에 오르는 쟁반과 떡의 종류, 개수는 궁정 예식에 따른 각각이었다. 떡 품목을 잘못 올리거나 개수가 틀리면 밥상을 차린 상궁은 매를 맞거나 심지어 목이 잘렸다고 한다.

“그때 민간에서는 떡은 금물이 되었고요, 나중에 서민들은 떡 대용품으로 찹쌀 지짐을 제물 차림에 올릴 수 있었다고 합니다.”

궁정떡의 전승인 김성찬(金成燦)은 이렇게 떡의 옛 이야기를 전했다. 성묘할 때 ‘떡의 지짐이가 석판에 달라붙지 않도록 기름을 붓고 앞뒤로 뒤집어가며 지지는데 실은 제사에 기름 냄새를 풍기기 위한 게 아니라는 것이다.

할머니 정봉금(鄭鳳今)은 선조가 조선 왕조의 대감이었는데 그가 임금의 특혜로 궁정떡의 조리법 책을 하사 받았다고 한다. 궁중의 음식 품목에만 있던 떡은 그렇게 종국적으로 민간인의 식탁에 오를 수 있은 것이다.

“할머니가 말씀하시던데요. 궁정 조리법 책은 정씨네 옛 사당(祠堂)에서 공봉 하는 몇몇의 귀중한 진품이었다고 합니다.”

두루미춤도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마침내 궁중 밖의 민간(예인)에 전해졌다. 1952년, 안도(安圖)현 만보(萬寶)향에서 농민여가(업여, 業餘)문예회보 공연에서 민간 예인 김재선(金再善)에 의해 처음으로 연변 현지에 알려졌다. 김재선은 반도의 강원도 태생으로 예인 출신의 부친으로부터 이 춤을 습득했다고 전한다.

훗날 김재선은 두루미(학)춤과 더불어 거북이춤, 사자춤 등등 많은 민간무용을 며느리에게 전수했고 이런 춤은 나중에 안도현 문화관 전 관장 강덕수(姜德洙 등)에 의해 발굴, 정리, 전승되었다. 한편 궁정무의 학무(鶴舞, 학춤) 역시 궁정떡의 품목과 개수, 조리법과 마찬가지로 이때는 이미 사망한 김재선처럼 다다소소 두루미의 깃털과 더불어 하늘 멀리로 영영 날아가지 않았을지 한다.

“궁중과 민간의 신앙, 습속은 아무래도 서로 다른 차이가 있습니다. 궁정 음악은 아악(雅樂)이라고 하고 민간의 음악은 속악(俗樂), 속칭 농악(農樂)이라고 합니다.”

무용학자 손륭규의 말이다.

손룡규는 북경무용학원의 최초의 안무 학부장으로 무용계에서 공인하는 전문가이다. 그의 말처럼 아악의 궁정무 학무는 훗날 민간의 속악으로 유전되면서 일부 유실되었고 언제부터인가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안도(安圖) 현지에서 전문적인 농악처럼 풍작 등을 기도하는 축문(기도문)을 낳기에 이른다.

사실상 속악은 백성들이 오곡의 풍성(五谷丰登)을 기원하여 자발적으로 올리는 제사 등 행사 때 행하는 민간 음악으로 고대 제왕이 하늘과 땅에 제사를 하고 궁정의 연회나 축제 등 행사에 사용하던 음악의 아악과는 이런저런 다른 형국이다.

그리하여 두루미(학)춤은 궁정의 악무(樂舞) 종목으로부터 시골마을의 축제 행사의 일부로 변신한 후 결국 다른 양상을 하게 된다.

“올해 농사를 풍요롭게 해주옵소서. 가족의 건강을 지켜 주옵소서, 우리 마을을 태평하게 해주옵소서…”

두루미(학)춤의 민간 춤마당에 자주 출현하는 축문(기도문)의 한 부분이다. 이때 몸에 형형색색의 천 조각을 두르고 화려한 가면을 쓴 무용수는 자의든 타의든 관객에게는 여느 무당처럼 읽힌다. 그러고 보면 안도 현지에서 두루미(학)춤이 무당의 의식 무용에서 유래되었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게 더는 이상하지 않다. 현지에는 심지어 사찰의 승무(僧舞)에서 비롯되었다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고 한다.

안도의 두루미(학)춤은 20세기 초 반도의 민간 예인 김재선 부자를 따라 현지에 이주, 정착한 것이다. 이 춤은 궁정무의 민간의 전승과 발전, 변화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겠다. 신분과 지위의 각이한 이해와 춤 수준에 따라 두루미(학)춤은 이처럼 시기나 지역마다 서로 다른 양상으로 나타날 수 있다.

“학춤처럼 동물을 모방한 춤은 농악이나 탈놀이, 무당굿에서 자주 볼 수 있지요.”

손룡규는 동물의 흉내를 내는 이런 춤은 동작과 몸짓, 노래 등이 모두 모방성이 강하게 드러난다고 말한다. 고대 원시인들의 수렵생활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보는 동물춤은 현실적으로 두루미(학)춤 등으로 아주 다양하다.

무대에서 공연하고 있는 안도의 학무(鹤舞)

반도의 경기도 지방 거북이놀이와 탈춤의 사자춤, 원숭이춤, 전라도의 곰춤 그리고 전남지방의 용두(龍頭)춤, 경기지방의 오리춤 등이 그러하다. 막상 이처럼 동물춤이라고 해도 꼭 궁정무이었던 것은 아니다. 또 오늘날 민간에 유전하고 있는 동물춤이 두루미(학)춤처럼 한때 궁중에서 행하던 아악(雅樂)이었다고 해서 결코 동식물이나 자연물을 형상한 토템의 춤은 아니라는 것이다. 고대의 토템 춤은 오늘날 기본상 실전되었으며 현재로선 문헌 기재에도 없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아무튼 궁정무의 학무(학춤, 鶴舞)는 분명히 토템춤이나 동물춤이 아니었다. 두루미의 모양을 따서 깃과 부리 등 보조물을 무용수의 몸에 붙여놓는 것은 동물춤의 두루미(학)춤이나 탈춤의 두루미(학)춤 그리고 궁정무의 학무(鶴舞)에도 나타나지만 궁정무의 학무는 개막사의 도입부 역할을 할 따름이며 또 상징적인 함의를 표현한다. 한약을 배합할 때 약효를 조절, 증강하기 위해 주약재에 배합하는 보조약품(藥引子) 격이다. 두루미는 하늘의 새로 천계의 신선과 이웃한다고 하며 그래서 신령스런 두루미라는 의미의 선학(仙鶴)이라고 불린다. ‘연통(蓮筒)의 동남동녀에 닿는 두루미의 ‘선기(仙氣)’가 바로 이 보조약품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러한즉 원초의 궁정무 학무인즉 토템춤이나 동물춤이라고 말하는 것은 한마디로 어불성설이다.

“춤의 아름다운 예술을 엉터리로 설명하고 있네.” 손룡규는 인터뷰 도중에 어이가 없다면서 연신 혀를 찼다, 보아하니 길상물과 토템이 헛갈리고 있으며 개념부터 잘못 되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무용계에서는 아직 선인(先人)들의 토템 춤을 아직 제대로 정리하지 못한 현 주소이다.

당나라 무측천 황후가 애용했다고 전하는 모란떡, 김씨 가족이 전승했다 

송나라 때 반도에 전했다고 하는 궁정떡

사실상 대륙의 주해는 물론 반도의 부산 동래 지방에도 두루미(학)춤이 전승되어오고 있다.  동래 학(두루미)춤은 궁중무의학무(학춤, 鶴舞)와 달리 자유분방한 즉흥성과 개인적인 흥이 강조된다. 무용수는 북, 장구, 꽹과리, 징 등의 굿거리장단에 맞추어 춤을 춘다. 그러나 두루미의 우아한 몸짓을 표현한다는 데는 별 다름이 없다. 공교롭게 예전의 궁정무의 학무처럼 비슷한 시기인 정월 대보름날에 추던 춤이다. 어느 춤꾼이 도포에 갓을 쓰고서 덧배기 춤을 추는 모습이 흡사 ‘학(두루미)이 춤추는 것과 같다’고 한데서 학춤(학무, 두루미춤)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두루미는 언제부터인가 하늘의 달빛의 궁전에서 날아 내려와 그냥 하늘아래의 요지경 같은 인간세상을 감돌고 있는 것이다.

아니, 어느 날인가 달빛이 비치는 인간 궁궐에 또 두루미가 무리지어 날아들고 떡의 향기가 다시 풍겨오지 않을까… 송나라 때 두루미(학)춤이 바다 건너 불쑥 나타났듯 두루미의 날갯짓과 울음소리가 귓가에 새삼 들릴 듯한다.


 김호림

언론인

작가



김호림의  문화탐험  

[김호림의 력사탐사] 북경의 산중에 있은 고려인의 사찰

[실화라고?] 김호림 기자가 취재한 "단군부족의 비밀"


김호림(金虎林)프로필 

 중국국제방송국 직원

  “고구려가 왜 북경에 있을까”

  “지명으로 읽는 이민사, 연변 100년 역사의 비밀이 풀린다” 

  “조선족, 중국을 뒤흔든 사람들” 

  “‘삼국유사’ 승려를 따라 찾은 이야기” 

  “반도의 마지막 궁정 점성가”

  “무엽산의 연꽃과 세발가진 두꺼비” 

  등 등 10여편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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