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변의 백년옛집들] 어여쁠사, 시골 풍경 속의 오롯한 그 모습

文摘   2024-10-13 05:42   吉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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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여쁠사, 시골 풍경 속의 오롯한 그 모습

“19세기 중엽에 이르러 많은 조선인들이 중국 동부에 이주하면서 전통적인 살림집 짓기 기술을 거의 그대로 전승했습니다. 우리 지역에는 아직도 이주 초기의 살림집이 남아있는데 특히 두만강류역에 남아있습니다. 대부분 조선반도 함경도식 풍격으로 지어진 살림집입니다.”
연변대학 공학원에서 건축설계학을 가르치고 있는 김창걸 박사는 오랜 세월 동안 굳건히 자리를 지켜온 전통민가는 마치 살아있는 력사책과도 같다고 말한다.
조선반도의 전통문화를 기반으로 이주 지역의 특색이 있는 조선족 주거문화를 형성해온 우리의 전통민가에는과학적이면서도 독특한 풍격의 집짓기 기술이 녹아있다. 조상들의 지혜가 깃든 이 독특한 건축방식은 이제 무형문화재로 인정받으며 그 가치를 더욱 빛내고 있다.

룡정 지신진 장재마을에 남아있는 옛집.

그리고 우리는 100년을 훌쩍 넘기는 세월을 간직하며 아직도 남아있는 전통민가를 찾아 떠나는 특별한 려정을 시작했다.
‘산이 열린 동네’라 해서 개산툰이라 불리우는 곳, 룡정 시가지를 벗어나 내내 동쪽으로 달리다가 강건너 조선의 종성과 마주한 산굽이를 돌면 불현듯 넓은 벌이 눈앞에 펼쳐진다. 맑은 샘물이 있는 벌이라는 의미의 천평이다. 옛날에는 샘물 주위에 집을 짓고 촌락을 이루면서 마을 이름을 ‘샘물 구팡’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구팡’은 처마 밑에 마루를 놓을 수 있게 쌓아 만든 것을 말하는데 이때는 샘물 근처의 높은 지대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겠다. 이 샘물 구팡의 제일 우쪽에 자리잡은 동네가 바로 개산툰이다.
100년이 훌쩍 넘는 세월을 거뜬히 이겨낸 전통고택 한채가 바로 이곳, 룡정시 개산툰의 자동촌에 있다.

룡정 개산툰진 자동마을의 옛집.

마을 어구에 들어서자, 시간이 멈춘 듯 고즈넉한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흙벽과 기와지붕 그리고 널직한 마당을 가진 전통가옥이 마치 그림 속 장면 같았다.
우리가 자동마을을 찾은 날에 마침 마을 로인협회 회장인 김동운(80세) 할아버지를 만날 수 있었고 덕분에 이 오래된 고택에 얽힌 이야기를 전해들을 수 있었다.
이 집은 1900년 즈음에 시인 윤동주의 할아버지가 명동에 지은 것이라 한다. 두만강을 건너 명동마을에 정착한 윤동주의 할아버지는 당시 부유한 농부였다. 그는 직접 조선에서 기와를 가져다 지붕에 얹었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지붕 끝머리에 무궁화 문양의 막새기와가 얹어져있었다. 일반적으로 6칸 또는 8칸이 보편적이지만 이 전통가옥은 12칸으로 지어진 집이다. 우리 지역 전통가옥중에서도 규모가 큰 집으로 꼽힌다. 그러다 이후 어떤 원인으로 이 집은 지금의 자동마을로 이축이 됐다.

관광명소가 된 도문 월청 백룡촌의 옛집.

지난 세기 60년대말, 70년대 중반까지는 촌사무실로도 사용이 됐단다. 그리고 그 뒤에 집주인이 수없이 바뀌였고 지금은 왕원생이라는 한족 집주인을 거쳐 우국강이라는 산동에서 온 사람이 지키고 있다.
다시 길을 떠나 이번에 마주한 전통가옥은 룡정 삼합의 북흥촌 천수포의 두만강 서안에 자리를 잡은 백년민가이다. 전통민가는 2014년에 길림성중점문물보호단위로 확정됐다.

우리 지역에서 가장 잘 보존되여있는 룡정 삼합 북흥마을 옛집.

김창걸 박사는 “전통적인 팔간토목 구조의 기와집으로 길이 13메터, 폭 6메터이고 헐산식(歇山式) 지붕을 갖추고 있습니다. 가옥 기둥의 탄화 정도로 분석한 결과 지어진 지 170년은 족히 되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또 “전통살림집들은 평균 30년 남짓한 수명으로 낡아지고 허물어져가는데 이 집은 문짝 하나 비틀어짐 없이 잘 보존되여왔습니다. 오랜 세월에도 불구하고 우리 전통민가가 여전히 튼튼한 리유는 바로 자연과의 조화를 이룬 우리 건축방식 덕분입니다.”라고 설명을 얹는다.
이 집의 주인이였던 량기현(1933년 출생)은 지난 2020년에 돌아가고 지금은 아들 량성택이 물려받아 집을 지키고 있다.
1960년대초 량기현은 천수포의 생산대(지금의 촌민소조에 해당됨) 대장으로 되였다. 골안의 초막에 살던 농민의 자식이 일약 벌 동네의 수장으로 된 것이다. 사실상 량기현에게 있어서 천지개벽의 변화는 그가 대장이 되던 즈음인 1961년이 아닐가 싶다. 그가 예전에 부농이 살던 천수포의 팔간기와집에 새 주인으로 입주했던 것이다. 지금의 백년민가였다.
워낙 부농 한씨가 이 팔간기와집에서살고 있었는데 부농으로 청산된 그 무렵 근처의 두만강에 익사하면서 딸과 사위가 한동안 팔간기와집에 얹혀살았다. 나중에 그 딸과 사위가 타지로 이주하게 되자 생산대에서는 돈 500원을 주고 이 팔간기와집을 사서 마을 식당을 운영했다. 그리고 1957년에 이런저런 원인으로 식당운영을 포기하고 개인에게 팔았는데 그때 량기현이 사들였던 것이다.
량기현은 천수포에서 30년을 대장으로 있었고 그 후 20년을 마을의 로인협회 회장으로 있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아들 량성택이 물려받은 집은 동네의 명물로, 조선족 전통민가의 상징물로 되였다.

전통민가 짓기 기능 보유자 황호림.

량성택은 “퇴근을 하고 저녁 대부분 시간을 이 집에서 보내고 있습니다. 낡고 오래된 집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여전히 살림살이를 하는 데 불편함이 없을 정도로 튼튼하고 정 또한 깊습니다.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한 온돌방은 우리 가족의 사랑방입니다.”라고 전한다.
다시 발걸음을 옮겨 찾은 전통가옥은 룡정시 지신향 장재촌에 위치해있다.
이 마을에서 70여년을 산 촌민 류춘길이 안내에 나섰다.
따가운 해살 아래 펼쳐진 옥수수밭을 가로지르니 마침내 오래동안 찾아 헤매던 팔각 기와집 한채가 모습을 드러냈다. 멀리서 보아도 독특한 팔각형의 지붕과 기와가 눈에 띄였다. 짙은 색의 기와가 해빛에 반짝이며 고즈넉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마치 시간이 멈춰버린 듯 고요한 정적이 감돌았다.
가까이 다가가 팔간기와집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오랜 세월을 견뎌온 듯한 나무 기둥과 서까래는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낡은 기와에는 이끼가 끼여있었지만 그 자체가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어냈다.
김박사가 “보수처리가 제대로 되여있지 않아 각 부재 뒤틀림 변형 등이 심각한 상태입니다. 일부 부재는 ‘자리잡음’에 의해 일정한 뒤틀림과 변형은 허용되나 여러 부재들은 과도한 변형으로 보수수리 필요성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집이 100년을 훌쩍 넘는 시간을 버텼으니 조상들의 건축기술은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고 말한다.
이 집은 기와에 새겨진 무늬가 아주 다양한 것이 특징이였다. 막새기와, 망와, 사래기와에는 모두 무늬가 새겨져있다.
류춘길은 “집의 원 주인은 리현극인데 그의 조부가 1900년에 이 집에서 태여났다고 합니다. 그 뒤로 이 마을의 김종관, 김치관, 김복남에게로 넘어가면서 살다가 지금은 외지인이 주인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라고 기억을 더듬는다.
그리고 계속해서 두만강 중류를 따라 내려오노라면 도문시 월청진 마패촌에 이른다. 과거에는 이곳에 기와집들이 즐비하게 늘어서있었으나 1980년대 이후로부터 다 사라지고 지금은 백룡촌에 한채가 남아있다. 도문의 관광명소로 된 ‘백년부락’이다.
백룡촌의 기와집은 기와의 형태로 보아 1930년대에 조선에서 가져온 기와로 지은 집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이 기와집은 지금의 주인인 김경남씨에 의해 보수가 아주 잘된 집이다. 파손된 문과 벽은 보수과정을 거쳐 뒤틀림 하나 없이 새롭게 단장됐다.
김경남은 “1880년에 조선에서 이민해온 상인 박여근이 이 집을 지은 것으로 압니다. 지금은 관광객들이 찾아오는 곳이니 뿌듯합니다. 우리의 력사와 문화를 담고 있는 소중한 자산인겁니다.”라고 전한다.
낡고 해진 벽과 기둥, 그 틈새로 스며든 세월의 흔적들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준다. 이런 전통민가들은 마을의 변화를 묵묵히 지켜보았을 것이다. 흥미로운 이야기와 사연들이 집 곳곳에 스며들어있다. 마치 시간이 멈춰버린 듯 고요한 이 공간에서 우리는 과거 사람들의 삶과 지혜를 엿볼 수 있다.
이런 집들은 단순히 돌과 나무로 지어진 건물이 아니다. 자연과의 조화를 중시하며 지혜로운 조상들의 손길이 깃든 건축물이다. 해볕이 잘 드는 방, 통풍이 잘되는 구조, 자연재해에도 견딜 수 있는 튼튼한 기둥 등 모든 것이 자연과 사람이 함께 살아가는 데 최적화되여있다. 오랜 세월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튼튼한 리유는 바로 자연과의 조화를 이룬 건축 방식 덕분일 것이다.
김박사는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빠르게’ ‘쉽게’ ‘편리하게’ 만든 건축물에 익숙해졌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우리는 무엇을 잃어버렸을가? 자연과의 조화, 력사와의 련결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에 대한 경위심입니다. 100년을 넘긴 이 전통가옥은 우리에게 잃어버린 것들을 되돌아보게 합니다.”
다행히도 우리에게는 전통민가 짓기 기능 보유자들이 있다. 그들은 오랜 시 간 동안 전통건축 기술을 이어오며 옛 방식으로 집을 짓는 장인들이다. 이들의 손을 통해 우리는 옛 모습을 되찾은 전통가옥을 만나볼 수 있다.
대표적인 기능보유자로 제4대 전승인 황호림과 제3대 전승인 김종식이다.
김종식(1939년 출생)의 조부와 부친은 1910년대 이전에 조선반도 함경북도 유선군에서 지금의 룡정시 삼합진 하마래촌에 이주해왔다고 한다. 김종식은 15살부터 조선족 전통민가 짓기 기술과 가구나 일상생활용품을 만드는 목공기술로 린근에 널리 알려져있었다. 그러다 1962년부터는 평생을 명동공사에서 세운 민영기업에서 집짓기와 생산도구, 가구 등을 만드는 일에 종사해왔다.
연길시 춘흥마을에서 자신이 직접 지은 전통가옥 ‘호림석고헌’에서 살고 있는 제4대 전승인 황호림(1967년 출생)은 “저의 할아버지 황윤은 조선반도에서 알아봐주는 유명한 대장쟁이였고 목수였습니다. 할아버지 영향으로 저도 어릴 때부터 철공과 목공 기술을 배웠습니다.”라고 털어놓았다.
그가 옹근 10년이란 시간을 들여 지은 ‘호림석고헌’은 마을 한복판에 자리하고 있다. 1996년에 춘흥촌에서 농가 한채를 사들여서 직접 조선족 전통주택으로 설계하여 지은 집이였다.
황호림이 우리 지역에 직접 지은 전통살림집만 10여채에 달한다. 자신을 통해 우리에게 전통가옥의 옛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던 그는 린근의 박씨촌, 최씨촌의 밭에서 발견한 기와 몇장을 훈춘기와공장에 보내 생산해서 전통가옥을 짓는 데 썼다. 황호림은 “전통가옥은 단순히 과거를 기억하는 공간이 아니라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우리에게 힘을 주는 공간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조상들의 지혜를 이어받아 전통가옥을 보존하고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야 합니다.”고 말한다.
글·사진 신연희 기자/연변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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