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돌들은 제주 사람들의 삶을 개선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돌담 안에 물고기를 가두었다가 잡는 어로 문화를 만들어 냈으며, 농업과 목축업의 발전에도 크게 기여했고, 외부 세력의 침략과 약탈을 막는 긴요한 용도로도 사용되었다. 제주 곳곳에 산재한 여러 형태의 돌담은 곧 이곳 사람들이 살아온 삶의 모습이다.
济州的石头在改善济州人的生活方面发挥了重要作用。它创造了用石头墙围鱼的捕鱼文化,大大促进了农业和畜牧业的发展,在阻止外部势力的侵略和掠夺方面也发挥了巨大作用。济州各地散落着各种形态的石墙,这些石墙反映了当地人的生活面貌。
조선시대에 말을 원활히 방목하고 관리하기 위해 국영 목장의 울타리를 돌담으로 쌓았는데 이것이 ‘잣성’이다. 산 아래쪽에 위치한 잣성은 개발이나 훼손으로 흔적만 남은 경우가 많지만, 중산간 지대의 잣성들은 아직 형태를 보존하고 있는 것들이 있어 제주 목축 문화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朝鲜王朝时期为了有效地管理和放牧马匹,国营 牧场的外围垒筑石墙,称为“墙垣”。位于山脚 下的石墙,由于过度开发和损毁,很多只剩下一 点痕迹。但山腰的部分石墙依然保存完好,向人们展示了济州畜牧文化的原始形态。
돌은 시간을 이긴다. 이 영원성의 매혹이 사람들로 하여금 커다란 돌을 세워 영웅적인 일들을 기념하고, 차곡차곡 쌓아 공간의 경계로 삼게 한다. 제주는 어디를 파든 돌이 나온다. 제주 사람들은 이 돌로 삼가야 할 곳과 침범하지 말아야 할 곳을 구분하고, 물길을 막고, 바람 길을 돌리고, 말을 가둔다. 이것이 바다 한가운데 솟은 화산섬에 대대로 정착해 온 사람들이 터득한 삶의 양식이다. 그 점에서 제주의 돌들은 덧없는 시간과 변화무쌍한 자연의 과잉을 통제하는 매혹의 규범 안에 있다. 그 규범의 본질은 노동이다. 그걸 모른대서야 1,950m의 한라산을 거대한 늙은 여인이 치마에 흙을 퍼 날라 만들었다는 고난의 창조 신화를 가질 수 있단 말인가.
石头的耐久性很强。正是因为这种独特的品质,人们或者立起巨大的石头,纪念伟大事件;或者将石头整齐地堆砌起来,隔离空间。在济州,无论哪里,都会挖出石头。济州人用石头隔出不该去和不能侵犯的地方、拦截水流、改变风向,以及搭建马棚。济州是大海中央凸起的一个火山岛,世世代代生活在这里的人们摸索出这种独特的生活方式。从这个意义上讲,济州石头的诱惑在于可以让人把控时间的稍纵即逝和大自然的变化无常。但是,这一切都离不开劳动。神话传说中说,一个身形巨大的老妇人把用裙子盛的土撒出去,造出了1950米高的汉拿山。如果不懂得劳动这一点,这一神话该从何谈起呢?
시간을 이긴 돌들은 푸른 바다와 하늘을 배경으로 닳고 닳은 침묵에 잠겨 있다. 피부는 거칠고 색깔은 검다. 자신의 정체성을 일깨워 주는 늘어진 곡선과 난폭한 구멍들, 누군가의 손가락을 밟으며 켜켜이 올라선 돌담, 어깨를 파묻고 부둥켜안고 있는 돌무더기들, 뒹구는 돌들의 부드러운 가장자리, 문신 같은 청동의 이끼들. 그리고 이 검은 알몸의 아랫부분을 가리고 돌아서 있는 어린 누이 같은 은빛 억새 들판과 한 무더기의 노란 유채꽃.
这些石头经过漫长岁月的洗礼,默默地睡在碧海旁和蓝天下。它们外表粗糙,黑漆漆的。奇特怪异的形状和上面深浅不一的小孔似乎在唤醒它们对自己本原的认知。它们有的被一双双劳动的手,层层堆砌,成了一道石墙;有的摩肩接踵,紧紧相拥,形成一座石堆;有的保留着圆润的曲线散落在地上;还有的上面布满了绿色的苔藓,好似纹上了图案。远处银色的紫芒开遍山野,和一簇簇黄色的油菜花一道将黑色的石头遮盖起来,仿佛一个娇羞的少女挡住胴体的下半部,背过身去。
우리가 할 일은 많지 않다. 고작해야 얼마 안되는 자료를 뒤적거리거나 아니면 돌들의 몸에 남은 상처인지 우정인지 모를 흔적을 살피다 잠시 먼 데를 보는 일뿐. 그러면서도 내심 돌 속에 스민 누군가의 온기와 시대의 목격자로서 퉁명스럽게 내뱉었을 걸쭉한 삶의 언어들을 다시금 느끼고 싶은 것이다.
我们要做的事情并不多,充其量就是翻翻仅有的一些资料,或者看看石头上留下的痕迹,不知是伤痕还是友情,然后再远眺他处。然而我内心里,更希望再次体味保留在石头中的先人的气息,聆听这些时代的见证者在漫长的生活中积攒的故事。
石网带来的捕鱼旺季
제주에서 가장 먼저 출현한 돌담은 ‘원(垣 stone weir)’이다. 시기적으로 고기잡이가 현생 인류의 출현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점에서 그렇다. 원담 혹은 갯담으로도 불리는 원은 고기를 잡기 위해 바닷가 연안에 1m 안팎의 높이로 돌을 쌓아 만든 느슨한 둑을 말한다. 그러니까 밀물을 따라 연안으로 나온 물고기 떼가 돌담 안에 머물다가 썰물 때 물이 빠지면 물고기들만 돌담 안의 얕은 물속에 가두는 장치다.
济州地区最先出现的石墙叫做“垣”。据说,捕鱼在济州自现代人类出现之前便开始了。垣,也被叫做垣墙,是为了捕鱼而建造的。在海边将石头垒成一米左右高,就成了一道简单的围墙。涨潮时,游到岸边的鱼群会停留在石墙里,退潮时,鱼儿们就被困在石墙里的浅水之中。
제주 바다의 특징 중 하나는 바닷가와 펄 사이에 용암 지대인 돌 바다가 가로놓여 있다는 것이다. 화산이 폭발하면서 뿜어져 나온 용암이 바다로 흘러들면서 생긴 특이한 지형이다. 바닷가에서부터 바다 속으로 길게는 2km까지 흘러간 곳도 있다. 제주 사람들은 이 바다를 ‘걸바당’이라 한다. 이런 환경에서 한반도의 리아스식 침강 해안에서는 보기 드문 원이라는 독특한 어로 문화가 생긴 것이다.
济州海域的特征之一是,海岸与大海之间有一个熔岩地带。这是火山爆发时岩浆流到海里形成的奇特地形,从海边延伸到大海深处,有的地方熔岩地带长达两公里。济州人称之为“岩石海”。在这种特殊的环境下,在里亚斯型沉降海岸上出现了罕见而又独特的捕鱼文化——垣。
원을 만들 때는 대개 바닷가의 자연 지형을 이용한다. 뭍 쪽으로 활처럼 휘어 만을 이룬 곳이면 양쪽 곶을 이어 돌담을 쌓거나 바위가 섬처럼 솟아 있는 곳에서는 그 암반에 의지해 양 옆에 돌담을 쌓기도 한다. 밑바닥이 움푹하게 꺼져 썰물 때도 물이 고이는 지형은 그 둘레에 야트막한 돌담만 쌓아도 널찍하고 훌륭한 돌 그물이 된다. 이런 원을 마을마다 적게는 10여 개에서 많게는 20여 개씩 가지고 있다.
垣大多是利用海边的自然地形建造而成的。在陆地一侧像一个弯弓形成海湾的地方,人们从两侧堆砌石墙,将两端连接起来。而在岩石像小岛一般凸起的地方,顺着岩石边在两侧堆砌石墙。在海底向下凹陷的地方,退潮时也会有积水,只要在周围垒矮墙,就会成为一张巨大的石网。这种垣,每个村子至少有十几个,多的甚至超过二十个。
제주 사람들이 철마다 고대하는 물고기는 크기가 10~20cm 정도 되는 멸치다. 제주말로 ‘멜’이라 부르는데, 이 멜 떼가 원 안까지 회유하는 8월이면 마을 사람들이 모두 나와 뜰채나 바가지로 멜을 건진다. 원은 마을의 공동 소유이므로 잡은 멜은 참여한 사람 모두에게 고루 나누어 준다. 당연히 원을 쌓고 보수하는 일도 함께 한다. 잡은 멜은 각종 양념을 넣고 조려 먹거나 기름에 튀겨 먹는다. 제주 사람들이 제일 좋아하는 음식 중 하나가‘멜국’이다. 갓 잡은 멜에 배추와 붉은 고추를 넣고 끓인 ‘멜국’은 담백한 국물 맛이 일품이다. 남은 멜은 말리거나 소금에 절인 뒤 양념이나 밑반찬으로 쓴다.
济州人每年渔季最期待就是鳀鱼了,鳀鱼一般体长10~20公分左右,济州当地方言叫做“麦鱼”。每年8月,成群结队的鳀鱼便会洄游到垣里,这时村里的人会全部出动,拿着捞网或瓢打捞鳀鱼。垣是全村的共同财产,捕捞上来的鳀鱼也是全部参与捕捞的人平分。当然,他们也共同参与垣的建造和修缮。捕捞上来的鳀鱼拌上各种调料,可以炖,也可以煎炸。济州人最喜欢的饮食之一要数鳀鱼汤。把刚刚捕捞上的鳀鱼,放上白菜和红辣椒炖成鳀鱼汤,那清淡的味道别提有多美味了。剩下的鳀鱼可以晾晒或者用盐腌制,用做调料或家常小菜。
해안 도로를 만들면서 원이 많이 훼손된 데다가 배 위에서 건조 가공까지 하는 멸치잡이 배들이 늘면서 원에서의 고기잡이는 한가로운 노인들의 몫이 되었다. 하지만 썰물 때면 하얀 파도 사이로 모습을 드러내는 굽이굽이 이어진 검은 돌담 풍경은 한철의 풍요에 들썩이던 그 시절의 마을 정경을 떠올리게 한다.
随着滨海大道的修建,很多地方的垣都遭到了不同程度的破坏,而且拥有直接烘干和加工技术的鳀鱼捕捞船逐渐增多,在垣里捕鱼就成了闲来无事的老人们的事了。然而每当潮水退去,在白色的浪花中,蜿蜒延伸的黑色石墙就会显现出来,让人想起捕鱼旺季时村子里热火朝天的景象。
제주의 전통 어로 시설인 원담은 해안의 자연 지형과 조수간만의 차를 이용해 고기를 잡을 수 있도록 돌을 쌓아 만들었다. 과거에는 해안가를 따라 수백 곳에 산재해 있었지만, 지금은 원형이 제대로 보존된 곳이 많지 않다.
垣墙是济州地区的传统捕 鱼设施,借助海边的自然 地形和潮汐差,用石头垒 砌而成。过去海边大约有 几百处,现在完好无损被 保存下来的地方已经不多见了。
走过千年风雨的农业遗产
제주에는 삼성혈이란 제법 엄숙한 관광지가 있다. 세 성 씨가 솟아 나온 구멍이란 뜻의 삼성혈 신화의 핵심은 이들에 의해 ‘오곡의 씨’가 전파되었다는 것이다. 시기를 가늠하긴 어려우나 어느 날 앞선 농업 기술을 가진 세력이 들어와 탐라라 불리던 이 섬의 지배 세력으로 자리를 잡았으리라는 해석을 가능케 한다. 그러나 우호적인 주변 세력으로 고려에 조공을 하며 통제와 감시를 받던 탐라는 결국 1105년 ‘탐라군’이란 읍호를 얻어 고려에 편입되는 길을 택한다. 이 시기에 흥미로운 사연 하나는 고려 때 제주 판관이던 김구(金坵 1211~1278)가 제주 사람들에게 처음으로 돌담을 쌓게 하였다는 기록이다.
“제주 밭이 예전에는 경계의 둑이 없어 강하고 사나운 집에서 날마다 차츰차츰 먹어 들어 가므로 백성들이 괴롭게 여겼다. 김구가 판관이 되어 주민의 고통을 물어서 돌을 모아 담을 쌓아 경계를 만드니 주민에게 편한 점이 많았다.” - 『동문감』(東文鑑)
济州有一处比较“肃穆”的风景名胜,叫三姓穴,意思是“三个姓氏出现的孔洞”。三姓穴神话主要讲述的是五谷杂粮的种子是由三姓氏传播开来的。具体时期现在虽然无法考据,但据此可以推断,一些拥有发达农业技术的人来到这座被称为“耽罗”的海岛并成为统治阶层。起初,他们只是一支对高丽十分友好的周边势力,向高丽朝贡,接受高丽的统治和监督。1105年,这里被高丽命名为“耽罗郡”,正式编入高丽版图。
据史料记载,这一时期,济州判官——金坵(1211—1278)首次鼓励济州人修建石墙。
济州田地自古没有地墙隔离,强权恶霸逐日吞并,百姓深受其苦。金坵任判官后了解当地百姓疾苦,找来石头修筑围墙,作为田地界限,为百姓带来诸多便利。(《东文鉴》)
인구가 늘면서 농지는 낮은 평지에서 중산간 지대로 점차 확대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개간할 땅이란 바위와 돌투성이고 그 사이에 덮인 흙은 대부분 화산회토(volcanic ash soil)라 강수량은 많아도 내리는 대로 땅속으로 스며들었다. 게다가 고려 시대의 농법은 휴한 농법(休閑農法 naked-fallow cropping)이다. 한 해 농사를 짓고 나면 땅의 거름기가 떨어져 지력을 회복하기 위해 한 해나 두 해를 쉬었는데, 이 기간에 농토가 풀로 뒤덮이고 또 폭우로 지형이 바뀌면 아마 이웃 밭과 경계를 정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이로 인해 토지 분쟁이 일어나고 또 이를 빌미로 지방 세력가들이 약한 백성들의 토지를 빼앗는 일마저 생기자 판관 김구가 토지 소유의 경계에 밭을 일구면서 나온 크고 작은 돌로 일정한 높이의 담을 쌓도록 지시했다는 것이다. 그의 재임 기간은 1234년부터 1239년까지다. 이 기록은 제주에서 밭담이 성행한 시기를 가늠하는 근거가 되었다.
随着人口的增加,农耕用地从低处的平地逐渐扩大到山腰地带。然而,要开垦的土地到处都是岩石和石头,中间覆盖的土壤大部分都是火山灰土,降水量再多也都会全部渗透到地下。而且,高丽王朝时期的农业采用休闲农法,也就是说,耕种一年后,土地的肥沃度降低,为恢复肥力,修整一年到两年。这期间,田间杂草遍布,遇上暴雨,地形发生改变,自家田地和邻家田地的界限可能难以分辨。
2014년 세계중요농업유산(GIAHS)으로 지정된 제주 밭담은 열악한 환경을 극복하기 위해 생긴 농업 유산이다. 제주 사람들은 밭에서 골라낸 현무암으로 담을 쌓아 강한 바람과 토양 유실을 막았다. 섬 전역에 분포해 있는 밭담의 전체 길이는 2만2,108㎞에 달한다.
济州田地围墙是为了克服恶劣环境 而形成的文化遗产。济州人用从田地里 挑出的玄武岩垒起围墙,阻挡强风,防 止土地流失。田地围墙分布在济州岛各 地,总长度达22108公里。2014年,济 州田地围墙被世界粮农组织指定为全球 重要农业文化遗产。
밭담을 쌓은 뒤로 많은 것이 달라졌다. 토지 경계를 다투는 일은 물론이고 방목하던 소와 말에 의한 농작물 피해도 줄었다. 밭담은 폭우에 의한 토양의 유실을 방지하고, 거센 바람을 막아 땅의 습도를 유지해 작물이 성장하는 데에도 유리했다. 농사일은 줄고 수확량은 늘자 돌 많고 척박한 고지대가 식구들이 기대어 살 만한 농토로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因此,土地纠纷时有发生,地方权势阶层甚至借机抢夺百姓田地。于是,判官金坵下令各家用垦田时挖出的大大小小的石头砌成一定高度的围墙。金坵从1234年到1239年在任。这一史料为判断济州地区田地围墙兴盛的历史时期提供了根据。
田地围墙建好后,很多事情发生了改变。不但围绕土地边界的纠纷减少,放牧的牛马对农作物的破坏也大为减少。围墙不仅可以防止暴雨造成的土壤流失、阻挡强风、保持土壤的湿度,而且对农作物的生长也十分有利。农活减少了,产量大大提高了,原本地势较高的地带石头遍地、贫瘠不堪,后来逐渐成为了全家人赖以生存的农田。
오늘날의 제주도는 국내 다른 지역에 견주어 농업이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가장 높으며, 그 대부분이 밭농사이다. 대표 작물로 감귤이 유명하지만 겨울 채소인 무와 당근, 브로콜리, 양배추도 빼놓을 수 없다. 제주 당근과 브로콜리는 전국 생산량의 70%를 차지하고, 무와 양배추, 가을감자는 40%를 오르내린다. 자연의 악조건을 이겨 낸 제주도의 밭담 농경지는 2014년 유엔식량농업기구(FAO)에 의해 ‘세계중요농업유산’으로 등재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제주 월정리에서는 해마다 그 가치와 아름다움을 알리는 ‘밭담 축제’를 열고 있다.
今天的济州岛与韩国其他地区相比,农业在地区经济中所占的比重最高。最有代表性的作物便是橘子,在韩国非常有名。除此之外还盛产冬季蔬菜——萝卜、胡萝卜、西兰花、大头菜等。济州的胡萝卜和西兰花占全国产量的70%,萝卜、大头菜和冬季土豆大概占40%左右。济州岛的石墙耕地克服了恶劣的自然条件,2014年被联合国粮农组织指定为“世界重要农业遗产”。以此为契机,济州每年都在月汀里地区举行“田地围墙庆典”,宣传其价值和美。
한 조사에 의하면 천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저마다의 방식으로 쌓기 시작한 밭담의 총 길이는 2만 2,000km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해안가에서 중산간 지대까지 제주를 거미줄처럼 엮어 놓은 밭담은 이제 농업적 가치나 빼어난 경관을 넘어 제주의 소중한 문화 유산으로 인식된다.
有一项调查显示,过去近千年间所建造的各种形态的田地围墙,粗略估测总长度达到2.2万公里。从海边到山腰地带,这些围墙像一个巨大的蜘蛛网将济州连接起来。现如今,田地围墙不仅具有农业价值,还是一道独特的风景线,更是济州宝贵的文化遗产。
밭담이 낮은 곳에서는 감자나 당근처럼 키가 작은 식물을 재배하고, 높은 곳에서는 조와 보리 같은 곡식을 키운다. 아무렇게나 쌓아 올린 것 같아 보이지만, ‘돌챙이’라는 전문 석공들이 공들여 쌓은 담이다.
田地围墙较矮的地方种植土豆、胡萝 卜等矮生植物,较高的地方种植谷子、 大麦等谷物。围墙看似垒砌得很随意, 其实是专业石匠们辛勤劳作的结果。
从田地围墙到军事石墙
해산물을 채취하는 틈틈이 거칠고 좁은 밭의 경계를 놓고 이웃과 실랑이를 하며 살던 제주사람들이 격변의 세계사 속에 등장한 시기는 13세기 후반 몽골과의 만남 이후다. 그러니까 칭기스칸의 손자인 쿠빌라이가 중국을 정복하고 원나라를 세운 직후였다. 이 무렵 강화의 임시 수도를 거점으로 한 몽골과의 오랜 전쟁에 지친 고려 정부가 개경으로 환도를 하며 친몽 정책으로 돌아서자 반몽 세력의 주축이던 고려의 정예 부대인 삼별초는 이에 불복하고 서남해안 진도를 거점으로 저항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다.
济州人自古以捕捞海产品为主业,在捕鱼的间隙,会因为土地边界不清而与邻里发生争执。有关济州一带战事的史料记载,要追溯到13世纪后期与蒙古人相遇以后,也即成吉思汗的孙子忽必烈统一中国建立元朝以后。这一时期,高丽王朝在江华建立临时都城,并以此为根据地同蒙古进行了长久的战争。饱受战争之苦的高丽王朝政府返回都城开京,采取亲蒙政策,而作为反蒙势力的核心——高丽精锐部队三别抄却拒绝降伏,以西南海岸的珍岛为据点组织了一支抵抗势力。
1270년 9월, 고려 정부는 삼별초의 퇴로로 예상되는 제주에 군사를 보내 해안가에 이들의 상륙을 저지할 돌담을 쌓도록 지시했다. 해안가에는 오래전부터 파도를 막고 정박에 용이하도록 쌓아 놓은 돌담들이 있었을 터이고, 이에 잇대거나 보강함으로써 처음으로 군사적 목적의 돌담을 구축한 것이다. 파도에 시달린 해안가의 돌은 둥글다. 그러다 보니 밭담처럼 외줄 쌓기가 어렵고 또 방어용이란 목적 때문에 쉽게 넘지 못하도록 여러 겹으로 높이 쌓았다. 물론 그 고된 노역은 제주 사람들의 몫이었다.
1270年9月,高丽王朝政府推测三别抄会退守济州,于是派遣军队驻扎济州,并下令在海边修建石墙,阻挡他们登陆。海边很早以前就建有很多石墙,用来阻挡海浪和停靠船只,在此基础上进一步连接加固,首次修建了以军事为目的的石墙。因为常年受到波浪的冲击,海边的石头都是圆的,很难像田地石墙那样垒成一排,但是出于防御目的,要求不能轻易翻越,因此层层堆砌,修建得又高又厚,当然这项艰苦的工作都是济州人完成的。
그러나 고려의 야심찬 계획은 그로부터 3개월 뒤에 상륙한 삼별초군의 역습을 막지 못하고 수포로 돌아갔다. 삼별초와 고려 사이에서 관망하던 제주 사람들이 그동안 강제 노역과 착취를 서슴지 않던 고려 정부보다는 삼별초에 더 호의적이었던 것이 패배의 원인이었다. 그러나 삼별초군의 방어용 진지로 바뀌어 재구축된 돌담 역시 몽골에 맞설 만큼 견고하지는 못했다. 이듬해 진도에서 대패한 삼별초는 제주에 재결집해 항거하지만, 1273년 2월 여몽연합군의 대대적인 협공에 패하고 만다.
그 뒤 이 해안 돌담은 원나라가 쇠퇴하기 시작한 고려 말부터 조선 시대가 끝날 때까지 수백 년 동안 물과 식량을 약탈하는 왜구들의 침략을 막는 방어용 진지로 바뀌었다. 잦은 왜구들의 발호에 맞서기 위해 조선 시대 제주 목사들은 대부분 무관 출신이 임명되었다. 19세기에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교류와 약탈이라는 두 얼굴을 가진 이양선의 출몰을 지켜보기도 했다. 언제부턴가 ‘환해장성(環海長城)’이라 불리는 이 해안 돌담은 제주 올레길을 걷다보면 쉽게 만날 수 있다.
三个月后,三别抄军队登陆济州,高丽雄心壮志的一番计划被三别抄军队的一次逆袭化为泡影。济州人在三别抄和高丽之间观望,相比曾经强制他们做苦役、压榨他们劳动的高丽政府,他们更加欢迎三别抄的到来,这也是高丽王朝政府军队溃败的主要原因。随后,三别抄军重新修建石墙,作为防御阵地,而石墙的坚固性有限,同样未能阻止蒙古的入侵。第二年,三别抄在珍岛惨败,再次回到济州希望能够重整军队继续抵抗,然而却在1273年2月在丽蒙联军的大举夹击下全线被剿。
从高丽王朝末期元朝势力逐渐衰弱到朝鲜王朝时代结束的几百年间,济州海边的这些石墙成为了抵抗倭寇掠夺水和粮食的防御阵地。为了抵御倭寇的频频挑衅,朝鲜王朝时期大都任命武官出身者担任济州牧使。19世纪,一艘艘西洋船只带着好奇的目光,打着交流的旗号,以掠夺为目的出没于此。不知从何时起,这片海岸的石墙有了一个新名字——“环海长城”。如果在济州的偶来小路漫步,可以不时看到,但其中大部分已坍塌损毁,似乎同那个宏伟的名字相去甚远。从位于偶来18号路线的禾北地区别刀烟台上向下俯视,海边的石墙足以让你感受到济州人曾经无路可退的绝望心情。
애월읍에 위치한 항파두성(缸坡頭城)은 고려시대 삼별초가 몽골과 맞서 싸우던 마지막 격전지로 1271년 이들이 제주로 거점을 옮기고 나서부터 축성되었다. 외성은 아래에 납작한 돌을 깔아 기초를 다진 후 흙으로 축조된 길이 6㎞의 토성이며, 내성은 중심부에 돌을 쌓아 만든 둘레 약 800m의 석성이다. 당시 쌓았던 토성 일부가 남아 있다.
缸坡头城位于涯月邑,是高丽王朝时期 三别抄同蒙古军队激战的最后一个战场。1271年,他们将根据地移至济州后筑起这 座堡垒。外城是在下面铺上扁平的石头打 好地基以后,用泥土建成的一座土城,长 达6公里;内城位于正中央,是一个用石头 垒砌而成的周长约800米石城。当时的土城有一部分得以留存。
바다로 침입해 들어오는 외적을 막기 위해 해안선을 따라가며 쌓은 돌담이 ‘환해장성’이다. 제주에는 19개 해안마을에 환해장성의 흔적이 남아 있는데 그중 동북쪽 해안의 화북동 구간이 비교적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이곳에 현재 620여 미터가 남아 있으며, 이 중 절반가량이 최근 보수되었다. 성의 높이는 약 2.5m이다.
为抵御日寇侵略而沿海岸线垒砌的石头 围墙叫做“环海长城”。济州海岸有19个 村子依然保留着一些环海长城的遗迹。其中,位于东北部的禾北洞一带依然保持着 原貌,迄今还有620多米,其中一半左右近 期被修缮,城墙高约2.5米。
成为游牧和农业的围墙
제주와 몽골의 만남은 필연적으로 대립과 갈등을 내포하고 있었지만, 100년 남짓 동안의 인적 물적 교류는 제주 사회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그 하나가 목축 문화의 유입이다. 마을 주변의 초지에 소나 말을 방목하는 일은 농업만큼 오래된 일이지만, 제주에 본격적인 말 목장이 만들어진 것은 삼별초를 제압한 원나라가 제주를 직할지로 삼은 직후인 1276년 160필의 말과 목축 전문가인 목호(牧胡)들을 불러들여 성산 일대에 ‘탐라 목장’을 설치하면서부터다. 이것이 오늘날 제주 말 산업의 출발점이다.
济州与蒙古的相遇不可避免地夹杂着对立和冲突,在一百多年的时间里,人员和物资交流为济州社会带来了巨大的变化,其中之一便是畜牧文化的传入。虽然在村子周边的草地上放牛、放马,同农业一样历史久远,但正式建立马场,是在元朝剿灭三别抄,将济州变为管辖地之后。1276年,元朝派来畜牧专家——牧胡,带着160匹马,在城山一带建了“耽罗牧场”,这便是今天济州马产业的起源。
그러나 공간을 유랑하는 유목민과 공간의 지배권을 확보해야 하는 정착민과의 근원적인 마찰은 원나라가 물러나고 새로 조선이 건국되면서 날로 더해졌다. 방목하던 말들에 의한 농작물 피해가 늘고 해안 지역에서는 부족한 목초를 두고 다툼이 커지자 1429년 제주 출신 관리 고득종(高得宗 1388~1452)이 세종에게 안정적으로 목마장을 운영하기 위한 대책을 건의했다. 한라산 둘레 중산간 지역을 10개의 지역으로 나누고, 각각에 국영 목마장을 세우겠다는 계획이었다. 핵심은 해안 지역의 농경지와 중산간 지대의 방목지 사이에 말이 넘어가지 못하도록 돌담을 쌓는 것이었다. 높이 1.2~1.5m의 돌담이 섬 전체에 둘러쳐졌다. 이것이 ‘잣’ 또는 ‘잣성’이다. 이렇게 조성된 목마장에서 국가 소유인 말과 개인 소유의 말을 공동으로 방목했다.
然而,牧民们需要有足够的土地放牧,居民们则需要获得土地的所有权,两者间这种不可协调的矛盾在元朝退出、朝鲜王朝建国后日渐加剧。牧马造成农作物损失不断增多,海边地区牧草不足,牧民和农民之间的争执不断增加。1429年,济州本地出身的官吏——高得宗(1388—1452),针对如何能够稳定地经营牧场向世宗谏言,将汉拿山周围山腰地带分为十个区域,分别建设国营牧场。而且最重要的是,在海边地区的耕地与山腰地带的牧场之间垒上石墙,防止马匹跨越。石墙高1.2~1.5m,将整个岛屿围成一圈,这就是“墙垣”。这样打造而成的牧场可供国家和个人共同放牧。
이 정책으로 제주의 목축업은 크게 번성했고, 여기서 길러진 말들은 대부분 군마로 쓰이거나 왕실에 진상되었다. 제주 동부 지역 산간에는 김만일(金萬鎰)이란 목축인이 수천 필의 말을 키우는 개인 목마장도 있었는데 그는 임진왜란 때 개인 말 500필을 나라에 헌납하고 그 뒤로도 크고 작은 전란이 있을 때마다 수백 필의 말을 바쳐 선조로부터 종1품의 헌마공신(獻馬功臣)이란 칭호를 받기도 했다.
这一政策极大地促进了畜牧业的发展,在这里被挑选出的马匹大部分被作为军马使用,或被献给王室。在济州东部山区还有一个私人牧场,一个叫金万镒的牧主在里面饲养了几千匹马。壬辰倭乱时期,他向国家捐献了500匹马,后来每当大大小小的战乱发生时,他都会捐献几百匹马,被宣祖封为“献马功臣”(从一品)。
잣에 대한 보완도 꾸준히 이뤄졌다. 말들이 더 깊은 삼림으로 들어가 길을 잃거나 동사하지 않도록 고산 지대에 ‘상잣’을 쌓았으며, 중간 지대에는 ‘중잣’을 쌓아 해를 걸러 농사와 방목을 번갈아 하게 함으로써 농토를 넓히는 효과도 누렸다. 이렇게 유지되어 오던 국영 목장은 일제 강점기에는 마을 공동 목장으로 변신해 명맥을 이었다. 소똥과 말똥을 주워 연료로 사용하는 제주의 풍습은 오랜 목축 문화의 산물이다. 겹겹으로 한라산을 에워싸던 잣은 개발과 방치로 훼손되고 유실되어 지금은 60㎞ 정도가 남아 있다.
不仅如此,济州地区还不断对城墙进行了修缮和扩展。为了避免马匹进到深山里迷路或冻死,在高山地区还建了“上墙”,山腰上建了“中墙”,隔年轮流耕种和放牧,极大地扩充了农田。通过这种方式,国营牧场被保留下来,到了日本殖民地时期,成为村子里的公共牧场,继续延续着它的使命。济州当地习惯于收集牛粪和马粪作为燃料,这也来自于悠久的畜牧文化。曾经层层环绕汉拿山的城墙,因为经济开发和弃之不管,大部分损毁和消失,现存的仅60公里左右。
눈여겨보면 제주의 돌담은 예전과 다르다. 생활과 환경의 변화로 존재 방식과 형태가 조금씩 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감귤 나무를 보호하기 위해 밭담은 더 높아지고, 늘어나는 자동차 도로 양옆에는 방호벽처럼 획일적으로 돌담이 들어서고 있다. 돌담을 더 단단하게 만들기 위해 철망 안에 넣거나 돌 사이에 시멘트를 채워 넣기도 한다. 변하지 않는 것도 있다. 그들의 표정은 여전히 무뚝뚝하다. 자기 안에 옛날의 가치를 지키려는 마음과 새로운 변화를 받아들이려는 마음이 충돌하는 복잡한 심사가 웅크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 이중의 욕망도 제주의 오랜 유산이다.
如果仔细观察可以发现,济州地区的石墙和以前大不相同。由于生活和环境的变化,其存在方式和形态也发生了变化。为了保护橘子树,田地围墙建得更高了。由于汽车不断增多,马路两旁整齐的石墙一字排开,俨然一道保护墙。为了保证石墙的稳固性,要么将石头放到铁网里,要么在石头之间抹上水泥。但不变的是,它们永远都是那么地僵硬、呆板,因为在它们的内心里,传承旧价值与接受新生事物的欲望在不停地斗争着,这两种相互冲突的欲望也是济州的遗产。
李昌起 诗人、文学评论家
安洪范 摄影家
李 民 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