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중국 룡칩의 어머니"로 알려졌다.
고희가 넘은 나이에도
그는 과학연구 일선에서 분투하며
국산 고성능 칩 개발에 몰두했다.
이젠 수고스럽게 직접 나서지 않아도 된다는
사람들의 걱정스러운 말에 그는
"저의 가장 큰 소원이 바로 포복으로
조국의 치욕을 닦아내는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그가 바로 황령의다.
그는 앞장서 서방의 칩에 대한 독점을 타파했으며
오직 중국"칩"을 만들기 위해 일생을 바쳤다.
1936년
황령의는 광서성 남녕시에서 태여났다.
어린 시절부터 조국이 강탈당하는 절망을 겪은
그는 일찌감치 조국을 위해
분투하리라는 뜻을 세웠다.
성인이 된 후
황령의는 우수한 성적으로
화중공학원 (지금의 화중과학기술대학)에 합격했다.
그는 또 훌륭한 성적으로
추천을 받아 청화대학에서 연수하며
주로 반도체 부품을 전공했다.
그렇게 그는 마이크로 전자학과 인연을 맺게 되였다.
학업을 마친 후
황령의는 화중공학원으로 돌아가
반도체 전공과 국내 최초의 반도체 실험실을 설립했다.
극도로 렬악한 상황에서도
그는 중국 반도체 2극관을 연구개발했다.
1962 년
황령의는 중국과학원 계산소로
전근해 일하게 되였다.
1965 년
"수소탄 원자탄 인공위성"의 난관을 돌파하기 위해
나라에서는 컴퓨터소 2부를 설립하고
마이크로 컴퓨터와 3극관 등 항목 공략에 들어갔다.
이것이 바로 중국 최초의 칩 연구팀이였다.
자료와 장비가 부족하고
인재와 원자재 등이 모두 부족한 상황에서도
황령의는 팀을 이끌고 심혈을 기울여
반도체 3극관을 성공적으로 연구제작했다.
그리고 칩 연구개발이라는
어려운 려정에 나섰다.
1978 년
황령의와 연구팀이 개발한 칩이
전국과학대회 중대성과상을 수상했다.
1984년에 이르러
트랜지스터 연구개발은 실질적인 진전을 가져왔으며
중국의 집적회로와 칩의 발전은
하지만 얼마후,
중국과학원은 경비가 부족하여
대규모적인 집적회로 연구개발을 중단했다.
이 소식을 들은 황령의는 목 놓아 울었다.
2001년
65세 황령의는 퇴직했다.
바로 그때
중국과학원 호위무 교수가
중국"칩" 제조를 위한 총집결령을 발표하고
직접 황령의를 찾아
함께 칩을 연구할 것을 청구했다.
경비부족 등 여건이 어려웠지만
황령의는 여전히 룡칩 연구개발팀에 합류했으며
항목 책임자가 되였다.
2002년 8월 10일
우리나라 최초의 통용 CPU "룡칩1호"가
연구제작에 성공했다.
비록 성능상의 차이는 있었지만
진정으로 국산 컴퓨터 칩이 없었던 력사를 끝냈다.
2004 년
"룡칩2호" 연구개발을 마친 후
황령의는 건강상
후속작업 진행은 무리라는 것을 깨닫고
자료들을 모두 정리해 제출한 뒤 퇴직신청을 했다.
그러나
그는 중국"칩" 연구를 손에서 놓을 수 없었다.
몇달간의 휴식을 마치고
결국 다시 룡칩팀으로 돌아와 연구에 정진했다.
그렇게 고희를 넘기고도 계속해
연구개발 일선을 지켰다.
사람들은 황령의에게 기본적인 작업은
젊은이들에게 맡기고
교정과 지도만 하라고 권했지만
그는 늘 손사래를 치면서
분주히 연구를 이어가군 했다.
황령의와 동료들의 끊임없는 노력으로
"룡칩3호" 등 많은 국산 고성능 칩들이 탄생해
고속철, 위성 등 령역에 쓰이고 있으며
서방의 기술적 봉쇄를 타파했다.
2023년4월 20일
황령의는 세상을 떠났다.
"저의 가장 큰 소원은 포복으로
조국의 치욕을 닦아내는 것입니다."
황령의는 자신의 일생을 바쳐
그 언약을 실천했다.
나라의 기둥이 되여준 그에게 경의를 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