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 · 潮歌网 www.zoglo.net
조선족글로벌네트워크 · 主播微信号:zoglo-net22
부부의 의미
김경희
요즘 들어 “부부는 하늘이 맺어준 인연이다.”라는 말이 너무 마음에 와닿는다.
세월을 40년 거슬러올라가 내가 20대 꽃다운 청춘이였던 때로 돌아가본다. 그 시절 나는 ‘철밥통’이라 불리우는 직업을 가진 멋쟁이처녀였다. 자연히 이성을 보는 눈이 매우 높았다. 좋은 맞선자리가 들어와도 번번이 거절하여 로처녀라는 소리까지 듣게 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지인의 소개로 만난 남자가 운명처럼 다가왔다. 그 사람의 첫인상에 무척 호감이 갔다. 남자의 조건을 들어보니 학벌도 좋고 전도가 유망해보였다. 하지만 좀 마음에 걸리는 것은 시골의 째지게 가난한 신안 주씨 집안의 맏아들이라는 점이였다. 고생문이 열릴 것이 불 보듯 뻔했지만 당사자의 매력에 얼마 지내보지도 않고 결혼까지 하게 되였다. 오로지 느낌 하나로 밀어붙여온 결혼이 지금에 와서 보면 하늘이 맺어준 소중한 인연의 시작이였다.
험난한 인생길에서 동고동락하는 ‘벗’
남편은 행운스럽게도 1977년에 하늘의 별따기라고 말하던 대학입시에 합격하여 대학생이 되였다. 개천에서 룡 난다고 동네방네 사람들이 축하를 보내왔다. 하지만 째지게 가난한 집에는 근심걱정으로 그늘이 드리워졌다. 당시 시아버지가 병환에 계셨기에 가정의 중임은 시어머니와 남편이 떠메고 있었는데 로동력 한명이 대학에 덜컥 가버리면 집안에 기둥이 없어지는 셈이여서 걱정이 태산같았다. 그래도 어쩔 수 없이 남편은 달랑 이불만 메고 담요도 없이 장춘으로 떠났다. 대학시절 남편은 3전짜리 무우짠지로 하루삼시를 때우면서 조학금으로 겨우 생활을 견지해나갔다. 그런 와중에 나를 만나게 되였던 것이다.
짐작한 대로 남편을 만나기 시작해서부터 나는 고생문이 활짝 열렸다. 남편이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3년간 뒤바라지만도 쉽지 않았는데 시집을 와서 맏며느리 노릇까지 온전히 감당해야 했으니. 시부모님을 돌보랴, 남편 뒤바라지를 하랴, 시누이, 시동생들의 여러가지 애로사항들을 해결하랴 참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보냈다. 내가 가족의 중심에 서서 생활의 기둥이 되다보니 그전의 멋쟁이처녀의 모습은 아예 찾아볼 수가 없었다.
남편이 대학을 졸업하면서 대도시에 배치 받을 수 있었으나 그동안 고생한 부모님께 보답해드리려는 마음으로 숱한 기회를 포기하고 기어이 고향으로 돌아왔다. 가족의 모든 일을 우선적으로 잘해주려고 애쓰는 남편은 시어머니의 소원 대로 시누이에게 집을 사주고 시동생에게는 우리가 살던 층집에 가구며 그릇까지 그대로 내주었다. 그 시절 귀했던 텔레비죤도 맨먼저 동생들에게 사주고 단위에서 분배해준 가스도 동생들에게 주었다. 동서가 서시장에 매대를 구해 자그마한 장사도 할 수 있게끔 도와주었고 심지어 조카들에게도 살길을 마련해주었다.
온 가족의 생계를 해결해주고 시골에 계시는 시부모님을 시내로 모셔와 그분들이 돌아가기 전까지 섬기면서 모든 일을 돌보느라 나는 변변한 옷 한벌 제대로 사입지 못하고 월급이 나오기 전에는 호조금으로 겨우겨우 살아왔다. 이런 상황들을 묵묵히 다 지켜본 시어머니는 맏며느리가 잘한다고 입에 침이 마르게 칭찬해주셨고 시동생, 시누이들도 우리 아주머니, 우리 형님이 최고라고 엄지손가락을 세워보였다.
살림이 넉넉치 못하던 젊은 시절, 우리 부부는 티각태각 다투기도 많이 다퉜다. 지나오고 보니 별일도 아닌데… 그래도 남편이 자기 앞 일을 열심히 잘하여 모 시의 중요한 책임자로 승급하던 날, 남편한테서 “우리 집에 시집 와서 고생도 많이 했지. 마음씨 착하고 도량이 넓고 부지런한 당신을 만난 난 참 복도 많은 남자야. 참으로 고마웠소. 당신이 내조를 잘해줘서 내가 오늘날까지 사업에만 몰두할 수 있었지.”라는 후더운 마음의 고백을 들으니 그동안의 고생이 봄눈 녹듯 사라지는 것만 같았다. 이런 멋으로 늘 버텨왔으리라… 돌이켜보면 참으로 행복했던 그 짤막한 순간들도, 힘들었던 지긋지긋한 나날들도 우리 부부는 서로 손 잡고 동고동락하면서 어깨나란히 앞으로 한걸음씩 내디디며 험난했던 인생길을 용케 헤쳐나왔다.
만년에 들어선 반쪽은 생활의 동반자
퇴직한 남편과 집에 같이 있는 날이 많아지면서 가끔 이런 생각이 든다. 성격도, 취미도, 습관도 극과극인 우리가 어찌 40여년을 함께 걸어왔을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으면 저도 모르게 감회가 새로워진다.
나는 외향적인 성격으로 친구도 많고 여러 행사에도 많이 다니고 여러가지 취미생활로 날마다 즐기면서 살건만 남편은 내성적인 성격으로 친구도 적고 취미생활도 별로 없다. 심지어는 텔레비죤 보는 취향도 다르다. 지난 올림픽 때는 매일 내가 텔레비죤을 독차지하다싶이 했다. 남편은 정치와 경제 채널을 즐겨보고 나는 체육과 문화 채널을 좋아한다. 젊은 시절에는 7시 뉴스가 나오는 시간은 무조건 남편의 차지가 되였지만 이제는 가끔 탁구나 배구 경기가 있을 때 내가 차지하기도 한다.
젊은 시절에 남편은 사회적으로 직위도 있고 많은 큰 문제를 해결하는 해결사였는데 일흔이 넘으니 점점 나에게 의지하는 것 같다. 대부분 시간 령도직에만 있던 남편이 이제는 여유롭고 푸근한 동네아저씨처럼 반팔티에 반바지를 입고 마트에 채소 사러도 다니고 심부름도 곧잘 들어준다. 그러다보니 나는 가끔 억지도 부려보고 내가 보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들을 마음껏 누려본다.
부부란 고운 정, 미운 정을 초월한 ‘지기’
요즘 남편의 건강이 별로 좋지 않다. 산책하다 넘어져 머리며 다리며 많이 다쳤다. 아버지가 다쳤다는 말에 어엿하게 키워놓은 딸은 기어이 북경으로 모셔가 큰 병원의 전문의를 보였다. 다행히 뇌출혈은 아니였다. 의사는 당뇨합병증을 조심하라고 당부했다. 외상을 입어 바깥출입이 편하지 않게 되자 함께 채소 사러 가고 공원산책이나 외식을 하던 때가 얼마나 소중한 시간이였는지 새삼 느끼게 되였다. 이젠 하루하루가 아깝고 언젠가 누군가 먼저 가겠지를 생각하면 마음이 슬퍼진다. 젊어서는 티각태각 싸우며 미웠던 적도 있었으나 늙으면 건강하게 함께 있는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생각된다.
건강상태가 더 나빠질 것을 대비해 요즘은 딸과도 미리 준비대책을 의론하군 한다. 남편과도 조용히 사후에 대해 론의한 적 있는데 남편은
“난 이미 유서까지 써놓았으니 이제 남은 시간들 서로 아기자기 잘살기요.”
라고 말하면서 조용히 내 손을 잡아주었다. 그 순간, 어쩐지 코마루가 찡해나고 후회스럽던 사소한 일들까지 생생하게 생각나면서 눈시울이 뜨거워났다. 그러면서 깨달은 바가 부부끼리 서로 아끼면서 살아가야겠다는 것이였다. 그런 맥락에서 나는 령감을 얻어 〈아끼면서 살아보세〉라는 노래의 가사를 쓰게 되였다. 내용은 이러하다.
나는 오늘도 이 노래를 흥얼거려본다. 돌이켜보면 남편을 만난 건 하늘이 나에게 준 참 고마운 인연이다. 남편을 만나 후회 없는 고마운 인생을 보냈다. 하늘에서 맺어준 인연, 고운 정, 미운 정으로 살아온 40년, 이제는 그런 세월 속에 겪어왔던 모든 좋고 나쁨, 맞고 그름을 초월해 우리가 매일매일 함께 살아있음에 감사하며 남은 인생을 아끼면서 살아가야겠다는 다짐 밖에 없다. 이제는 령혼의 일체가 되여 ‘한몸’이 돼버린 우리, 그래서 “자기야—”라고 부르게 되는 우리, 그것이 부부의 진정한 의미가 아닐가.
《연변녀성》2024년 11기
김경희
자유기고인
김경희의 작품세계
조글로
조글로 웹사이트에 진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