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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학생항일운동 성원시위 연변을 휩쓸다
리광인
화룡 평강벌을 지나 비암산 남쪽으로 크게 굽이도는 해란강
편자의 말:
11월 3일 오늘은 광주학생항일운동 95돐이 되는 날이다. 95년 전 1929년 10월 30일 전라남도 광주와 라주간의 기차통학생들 가운데서 일본인 남학생이 조선인 녀학생을 거리낌없이 모욕한 사건이 발생하고 이 사건은 광주시내 조선인학생들의 지대한 분노를 자아냈다. 마침내 11월 3일 그들은 일제히 동맹휴학을 단행하고 반일시위를 일으켰다. 11월 11일에 또다시 규모가 큰 반일시위가 일어났다. 이 이 소식이 삽시에 온 조선반도(한반도)에 전해지면서 전국적 학생반일시위로 확산되였다.
그 영향이 우리 연변에도 미치면서 11월 26일 화룡현 사립약수학교와 사립룡평학교 수백명 학생들은 선참 동맹휴학을 단행하고 투도구거리에 떨쳐나섰다. 잇따라 해란강 량안의 중소학교 학생들이 광주학생운동 지지성원 반일시위에 나섰다. 연변이 부글부글 끓었다. 이 반일시위운동은 이듬해 1930년 3월 까지 지속되였다. 1930년 3월 1일 이후에는 3.1운동 11돐기념시위에 합류되여 해란강 상류와 중류, 하류 지역들에서 더욱 세찬 파도를 이루었다.
아래 글은 그 시절 연변에서 터져오른 광주학생운동 성원지지투쟁 전후관계ㅡ전모를 보여주는 글이다. 여러 분들의 진지한 왕림을 기대하여 본다.
화룡과 룡정 구간 비암산에서 보는, 평강벌을 흘러 내리는 해란강의 장쾌한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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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11월 하순의 어느 날, 룡정 동흥중학교 출신들인 박세진, 김세준, 정룡, 리원상 등 한패의 청년들이 마을의 리경천, 손철운 등 선진청년들과 같이 화룡현 약수동 정룡의 팔간집 뒤고방에 모이였다.
“신문을 보았니?”
“보았다!”
“개자식들!”
약수동 태생이고 동흥중학교 재학생인 리원상이 말문을 떼자 모두 주먹을 불끈 쥐며 격분으로 차넘치였다.
사연은 이러하였다. 이해 10월 30일, 전라남도 광주와 라주간의 기차통학생들 가운데서 일본인 남학생이 조선인 녀학생을 거리낌없이 모욕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광주역에 하차한 후 조선인중학생들과 일본인중학생들 사이에는 일대충돌이 벌어졌다. 일제경찰들은 무턱대고 조선인 중학생들의 잘못이라 점 찍고 탄압하였다. 당년의《광주일보》는 이 사실을 허위 보도하였다.
일제놈들의 로골적인 민족적 차별시는 광주시내 조선인학생들의 지대한 분노를 자아냈다. 그들은 마침내 11월 3일에 일제히 동맹휴학을 단행하고 일대 반일시위를 일으켰으며 11월 11일에 또다시 규모가 큰 반일시위를 단행하였다. 시위는 피어린 충돌로 변해갔다. 이 소식이 삽시에 온 조선 반도에 전해지고 중국의 연변일대에 전해지자 온 세상이 끓어번지였다.
“이대로 지나칠 수 없다. 우리도 본때를 보여주자!”
정룡이의 집에 모인 열혈청년들은 목소리를 합치였다. 그리곤 사람을 원근의 사립룡평학교와 투도구 사립신흥학교에 보내어 약수동 사립약수학교와 함께 일제히 일어나기로 합의를 보았다.
해란강 최상류의 해란강 발원지 구간 모습
이해 1929년 11월 26일, 화룡현 사립약수학교의 100여 명 학생들은 사립룡평학교, 투도구 사립신흥학교의 수백 명 학생들과 함께 동맹휴학을 단행하고 해란강 중류에 위치한 투도구거리에 떨쳐나와 “일본제국주의는 물러가라!” “조선 광주학생운동을 지지한다!” 등 구호를 높이 부르며 연변 학생반일시위투쟁의 서막을 열어놓았다.
약수동의 100여 명 군중들이 리원상 등의 지도하에 학생들의 반일시위투쟁을 지지해나섰다. 시위에 앞서 리원상은 만약 놈들에게 체포되여 주모자를 물으면 자기의 이름을 대라고 헌신적으로 말하였다. 약수동의 기수 김완석은 붉은 기발을 들고 투도구 시내를 두 고패나 돌고도 모자라 주모자 리원상을 옆에 끼고 달려든 투도구령사분관 경찰놈들의 몽둥이를 빼앗아 휘두르며 대항하였다. 사람들은 저저마다 손에 붉은 천으로 된 삼각기를 들었는데 흩날리는 삐라는 눈송이를 방불케 하였다.
경찰놈들은 순순히 물러서지 않았다. 청년들 쪽에서 손응석이 신뒤축을 밟혀 넘어지는데서 숱한 청년들이 함께 넘어지며 놈들에게 틈 탈 기회를 주었다. 결과 이날 리원상, 손철운, 리종흡, 손응철, 리종빈, 김정숙, 손경숙, 정경숙 등 적지 않은 젊은이들이 령사분관 류치장에 끌려들어갔다. 체포된 삐라대의 리종흡은 허리띠에 감춘 삐라가 발각될까봐 앞의 사람들이 놈들을 막아서게 하고는 그 삐라를 한 장 한 장 씹어삼켜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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령사분관 류치장은 칸칸마다 나무를 촘촘히 박아세우고 사이에 복도를 두었는데 매칸에3~5명이 갇히었다. 한단락의 조사를 거친 뒤 며칠 사이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풀려 나왔다. 리원상, 손철운 등 소수의 골간들도 10일, 15일 만에 모두가 석방되였다.
투도구의 만세소리는 사처에 파다히 퍼지였다.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에서는 광주학생성원투쟁을 연변의 보다 넓은 범위내에서 벌리기로 결의하였다. 이 결의에 따라 조공당 동만도위원회에서는 1930년 1월 초에 평강벌 소오도구에서 전문 회의를 가지고 만주총국 선전부장 장시우를 통해 총국의 결의를 전달 받았다. 회의에는 동만도 위원회의 김창일, 한별, 강석준, 김만흥, 주현갑, 량환준 등이 참가하였다. 이어 동만도 위원회 책임자 김창일이 구체적 사업포치를 하였다.
회의 후 한별이 국자가와 왕청 방면을 맡고 떠나갔다. 강석준과 김만흥이 룡정과 달라자 방면을, 주현갑, 량환준이 장인강, 이도구, 삼도구를 맡았다. 강석준과 량환준은 또 격문의 작성, 인쇄 등 책임까지 맡아보았다. 조공당 엠엘파와 상해파 동만도위원회에서도 이파, 저파의 계선을 타파하고 투도구, 룡정을 중심으로 이 투쟁에 합류하였다.
직소로 불리우는 해란강 상류 바위구간 폭포 사진
새해에 잡아든 후 약수동 사립약수학교의 학생들은 조선공산주의자들의 지도밑에 형제학교의 학생들과 더불어 거듭 투도구에 내려가 반일시위투쟁을 벌리였다. 그런 어느날 평강벌 해란강 이북의 사립학교들인 약수, 룡평, 신흥, 협동, 일신, 와룡동, 청지허 등 학교학생들이 조공당 계통의 통일지시를 받고 너파내파를 가리지 않고 투도구 여기저기에 집결하였다.
오전 9시, 투도구 서쪽가에서 붉은 기발이 휘날리며 만세소리가 터져오르자 이 통일암호에 따라 각 사립학교 수천명 학생들이 일시에 투도구 거리에 떨쳐나섰다. 장인강 일신학교 쪽에는 이 학교의 골간학생들인 리구희와 문두찬이 학생대렬의 앞에 나서고 투도구 신흥학교 쪽에는 학생 총책임자인 류덕규가 학생대렬의 선두에 나섰다.
“일본제국주의는 물러가라!”
“식민지 노화교육을 철페하라!”
“조선의 광주학생시위투쟁을 견결히 지지한다!”
골목마다, 거리마다 터져나오는 구호소리는 하늘땅을 뒤흔들었다.
급해난 투도구령사분관 경찰서 놈들은 전부가 전신무장하고 나와 시위투쟁의 주모자를 잡으려고 광분하였다. 한편 해란강 너머 동쪽의 소오도구, 래풍동, 신풍동 이북의 비암 등지의 학생들을 해란강 물가에서 막아나섰다. 그 서슬에 이곳 사립학교의 학생들은 투도구 앞 해란강까지 갔다가 건너가지 못하고 래풍동어귀의 개척에 가서 수백 명이 함께 일제놈들을 단죄하며 만세를 불렀다. 룡두산 등지의 학생들은 놈들이 막아선데서 해란강을 건너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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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강벌 최서단에 자리잡은 해란강반의 이도구 쪽도 만만치가 않았다. 1930년 2월의 어느날, 이도구 주변의 수성촌 사립영동학교와 명암촌의 사립보진학교, 어랑촌 사립동일학교의 수백명 학생들은 저마다 삼각기를 들고 앞에 붉은 기발을 내세우고 선생들의 지도밑에 3렬을 지어 구산장으로 몰려들었다. 이날 그들은 베자루에 넣고 간 돌멩이로 일제 보통학교의 창문유리들을 모조리 마사버렸다.
어랑촌 동일학교의 한 학생은 손에 든 종이기발에 혈서를 써가지고 내려왔다. 혈서의 내용은 “일제가 중국에 발을 붙이지 못한다, 중국에 보통학교를 세우지 못한다”는 것이였다. 이에 힘 입은 학생들의 기세는 하늘을 찌를 듯하였다. 군중들이 옆에서 잘한다면서 성원하니 더욱 힘이 났다.
평강벌을 흐르는 해란강
바빠난 것은 이도구 경찰분서의 경찰놈들이였다. 이놈들은 적수공권인 학생들에게 감히 총질은 하지 못하였으나 몽둥이를 마구 휘두르고 물호스를 쏘면서 학생대렬를 해산시키려고 무등 애를 썼다. 만세를 부르던 도중에 어랑 동일학교의 학생 셋이 놈들에게 잡히였으나 2~3일 후에 다 풀려나왔다. 이도구와 그 일대의 사립학교 학생들은 한달 기간 련달아 구산장에 가서 반일시위투쟁을 벌리며 성세를 일구었다.
화룡현 삼도구는 조공당 동만도(화요파)의 간부 배동건이 직접 찾아갔다. 그는 삼도구 원화동의 안학선네 집에 머무르면서 안학선을 통해 학생반일시위투쟁을 짜고 들었다. 원화동 정동학교의 학생들은 3.1운동기념일을 앞두고 여러 학교의 학생들과 더불어 충신장(화룡시 소재지)에 가서 반일시위를 가지고 일제주구의 집들에 돌총질을 들이댔다.
이와 때를 같이 하여 중국인학교인 삼도구 현립6교의 김유송, 리태락, 김주한, 리두식, 강금식 등 조선학생들은 본교의 학생들을 조직하는 한편 형제학교들과 련계를 달고 거리로 나아갔다. 그들은 프랑카드를 들고 시위행진을 하면서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자!”, “국민당을 타도하자!”, “로명창 주구를 타도하자!”, “자주독립만세!” 등 구호를 끊임없이 불렀다. 시위대렬이 민국공안국 앞에까지 나아갔을 때 공안국에서 나오고 중국륙군대 놈들이 무장간섭을 하는데서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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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 투도구령사분관에서 온 놈들이 현립6교의 학생주모자 김유송, 리태흡 2명을 체포하여 가지고 길을 떠났다. 그들을 구출하지 못한 학생들은 6교의 한족 주교장한테 알리였다. 주교장은 지체없이 삼도구공안국에 련계하여 도움을 바랐다. 그때까지만 해도 일제식민통치를 달가워하지 않던 민국공안국은 령사관 놈들이 이미 삼도구구역을 벗어난데서 투도구공안국에 전화를 걸었다. 투도구공안국에서는 도중에서 길목을 막고 있다가 핑계를 대고 체포된 두 학생을 구출해냈다.
1930년 1월, 달라자 현립1교와 사립명동학교의 학생들도 당년 화룡현소재지였던 달라자 현성거리를 메우며 반일시위를 벌리여쑈다. 수십 명의 학생들이 민국경찰에 의해 체포되자 《민성보》사장이며 화룡현교육국장인 관준언이 나서서 교섭하여 구출해내였다.
허나 광주학생들을 성원하는 반일시위투쟁이 시작된 지도 한 달이 넘도록 조선족문화중심으로 불리우는 룡정은 잠잠하기만 했다. 《민성보》의 기자 김철
은 더 기다릴 수가 없어서 결연히 붓을 들어 “룡정의 학생들은 어이하여 침묵을 지키고 있는가?”라는 글을 써서 신문에 실었다.
평강벌을 흐르는 해란강을 가까이 당겨보다
광주학생운동의 소식과 투쟁에로의 호소는 세찬 격랑을 일으켰다. 조공당동만도 엠엘계 주요책임자의 하나인 강학제는 조직의 지시를 받고 동지들과 함께 대성, 동흥, 은진, 명신 등 6개 학교의 학생들을 선동하며 그들을 힘있게 투쟁에로 불렀다.
1930년 1월 23일, 드디어 룡정의 대성, 동흥, 은진, 명신, 광명, 영신 6개 중학교의 수천명 학생들은 동만청년총동맹의 지휘밑에 손에 태극기와 수기를 들고 거리에 나가 시위행진을 단행하였다.
“일본제국주의는 물러가라!”
“일본제국주의의 민족차별시 정책을 반대한다!”
“노화교육을 반대하자!”
수천명이 부르는 구호소리는 적들을 놀래웠다. 당황한 간도일본총령사관은 많은 순사와 기마경찰들을 풀어 대성중학교 학우회간부 리명식, 김창준 등 50여 명 학생들을 붙잡아 령사관 지하실에 가두었다.
분노한 1000여 명 시위학생들은 동만청년총연맹의 지시에 따라 은진중학교 운동장에 모여 성토대회를 열었다. 은진중학교는 룡정동산 영국조계지 안에 자리 잡았기에 일본놈들은 간섭할 수 없었다. 동흥, 대성, 은진, 명신녀자 등 중학교의 학생들과 일부 소학교의 고급학년 학생들이 한창 성토에 열을 올릴 때 령사관의 기마경찰 10여명이 조계지 철조망 밖에 와서 호각을 불면서 해산을 강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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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지 안의 학생들은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놈들은 할 수 없이 학생들과 담판하다가 여지없이 론박 당하였다. 쌍방 간에 육박전이 벌어질 때 건장한 학생 20여 명은 “때려라!” 소리와 함께 기마병들을 말에서 끌어 내려 한바탕 두들겨팼다. 그놈들이 찬 군도도 빼앗아 땅바닥에 짓밟아버렸다.
그날 룡정 반일시위가 있은 후 간도일본총령사관은 대성과 동흥 등 여러 중학교들에 매일 같이 사복경찰 2~3명을 보내어 주모자를 사출하려고 서둘렀다. 하루는 일본경찰 놈들이 《민성보》사에 뛰어들어 “신문보도는 도대체 누가 했는가?”고 따지고 들었다.
놈들은 원고들을 샅샅이 뒤집어 보다가 “룡정의 학생들은 어이하여 침묵을 지키고있는가?”라는 원고를 찾아냈지만 뜻밖에도 원고는 소학생의 필체로 되였다. 김철기자가 내리체로 한 소학생의 손을 빌어 원고를 베낀 데서 놈들은 아무런 단서도 잡지 못하였다. 대성, 동흥 두 중학교의 전체 사생들을 령사관 뜨락에 몰아다 언 땅바닥에 꿇어앉히고 세 시간이나 집단적 처벌을 가해도 주모자를 찾아내지 못하였다.
적들의 야만적인 행동은 룡정학생들의 지대한 분노를 자아냈다. 은진중학교와 명신녀자중학교 등 여러 학교의 학생 1000여 명은 다시 룡정의 영국조계지 안에서 집회를 가지고 일제놈들의 폭행에 강렬한 항의를 들이댔다.
화룡 평강벌 복판을 누비는 해란강
2월 5일, 룡정 여러 학교의 학생대표들은 한자리에 모여 “전 동만(연변) 학생폭동위원회”를 조직하였다. 그들이 살포한 삐라에는 “전 동만학생들은 깨어 일어나 적나라의 아성에 들어가 전선에서 용맹하게 싸우는 동포들과 함께 전투하자!”는 호소문이 실리였다. 잇따라 대성중학교와 동흥중학교의 학생들은 동맹휴학을 선포하고 재차 반일시위에 떨쳐나섰다.
거듭되는 학생 반일시위투쟁은 광명녀자중학교의 학생들과 보통학교의 학생들까지도 밖으로 불러냈다. 시위대렬이 일제보통학교인 중앙소학교 앞을 지날 때 구호소리에 감화된 학생들은 학교 당국의 엄한 통제에도 불구하고 와ㅡ하고 교실문을 박차고 나갔다. 일본인교장 사사끼는 “범새끼를 양굴에서 자래운다!”고 한숨만 풀풀 쉬였다.
이튿날 2월 6일에 은진, 동흥, 대성, 광명 중학교의 학생들은 일제히 련맹을 결성하여 동맹휴학을 단행하고 반일활동을 활발히 벌리였다. 적들의 준동이 계속되는 데서 2월 7일까지 총령사관에 끌려간 학생은 무려 166명에 달하였다. 그중 90명 학생들이 먼저 석방되였다. 나머지 76명 학생들은 령사관에서 심문을 받으며 시달리다가 2월 9일에 전부 풀려나왔다.
6
그 시절 서울의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광주학생운동 관련 두만강 북쪽건너 룡정의 실태를 수시로 기사화하여 세상에 널리 알리였다. 아래 여기 생생한 신문기사들을 그대로 올려 보기로 하자.
ㅡ1930.1.29. 동아일보 2면
28일 오전 9시경에 은진중학생90여명과 명진(明津)여학교 생도 80여명이 만세를 부르며 격문을 뿌린 사건이 있었다. 영사관 경찰서 경관대가 현장에 출동하여 학생 10여명을 검거취조 중이다. 동아학교 생도 150명도 참가하였다.
ㅡ1930.2.2. 동아일보 2면
지난 28일 이른 새벽부터 더한층 긴장한 속에 경찰들이 각 요소에 경계망을 늘이고 있던 중 은진중학교 학생 70여명은 학교조회를 마치자마자 만세를 고창하면서 일제히 백기를 들고 제각기 철필로 쓴 삐라를 뿌리다. 명신여자학교 학생 100여명도 준비한 붉은 잉크로 쓴 삐라를 뿌리면서 만세를 부르다. 당일 검거된 학생은 은진중학교 정봉한(郑凤汉), 조달수(赵达洙), 한달수(韩达洙) 등 30여명, 명신은 전명준(全明俊) 외 30여명이다.
ㅡ1930.2.6. 동아일보 2면
5일 오전 등교하는 각학교 학생 130명이 시중에 모이어 만세를 고창하며 시위운동을 벌리다. 영사관 경관대가 출동하여 해산시키는 동시에 3명의 학생을 현장에서 검속하다.
ㅡ1930.2.7. 조선일보 2면
5일 오전에 동흥, 대성 학생 300여명이 수기를 손에 들고 만세를 부르며 “광주학생에게 동정하자” 등 문구를 쓴 삐라를 뿌리며 시위운동하다가 포위하고 있던 경관대에 70여명이 체포되다. 각학교는 다수한 경관이 경계하더라.
비암산에서 보는 화룡 비암구간을 비롯한 해란강
1930.2.7. 동아일보 2면
총영사관에 검거된 은진, 명신 량교 남녀학생은 그동안 영사관 경관어학강습소에 구검되다.구검학생중 검속 당일부터 지금까지 5일동안 단식하는 학생도 있고, 이미 병난 학생도 있다. 그들은 아닌 밤중에 만세를 부르는 사실이 빈발한다고한다.
ㅡ1930.2.9. 동아일보 2면
지난 28일 학생만세사건으로 검속된 명신학교생 34명중 30명은 지난 4일 오후 4시경에 무사석방되다.
ㅡ1930.2.10. 동아일보 2면
지난 5일 낮 열한시반경에 동흥중학교 생도 140여명이 등교교정에 집합하야 두가지 기를 들고 만세를 부르며 삐라 다수를 살포하다.
대성중학교 생도 170여명이 만세를 부를 때 벌써 영사관 기마경관대 100여명이 총출동하야 일부 학생을 검속하자 200여명 학생 전부가 도주하다. 검속학생40여명은 압송되어 방금 취조를 받는 중이다.
ㅡ1930.2.15. 조선일보
12일에는 영신중학교70명이 역시 광주학생사건에 대한 만세를 부르고 시위
운동을 하다가 1명이 검속되었다더라.
ㅡ1930.2.15. 조선일보 2면
대성과 동흥,광명고여교(光明高女校) 200여명이 만세를 부르고 기를 휘두르며 격문 다수를 배포하다. 현장에서 1명이 검속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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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1930. 2.17. 동아일보 2면
광주학생만세사건으로 일시 휴교한 은진중학교는 지난 12일에 개학하였다. 1,2,3학년 생도 전부가 등교하였으나 전기 학생사건으로 검속된 학생을 동정하는 의미로 상학을 거절함으로 동교교장은 백방으로 말하였으나 듣지 아니하고 그대로 집으로 돌아갔다한다.
ㅡ1930.2.22. 동아일보 7면
지난 17일 오후 1시경에 영신소학교 약 80여명이 각기 만세를 부르자 이 소리를 들은 해성소학교 70여명이 손에는 붉은 잉크로 쓴 “조선학생만세”라는 수기를 각각 들고 만세를 부르며 시위운동을 하다. 미리 경계중이던 영사관 경찰서 기마대가 총출동하야 9명의 학생을 검거하다.
ㅡ19030.2.27. 동아일보 2면
동흥중학교와 대성중학교 52명중 49명은 지난 21일에 석방되다. 수모자 몇명은 계속 구검중이다.
룡정 구간을 흐르는 해란강의 한 모습
ㅡ1930.3.17. 동아일보 2면
광명여학교 학생 10여명이 지난 5일 만세소동을 일으킨 사건으로 지난 9일 경관 수명이 그 학교에 가서 소요생 6명을 경찰서에 데리고 가서 취조한뒤 5명은 지난 10일에 훈계석방하고 리자흔만은 구류 10일만에 즉결언도를 하다.
ㅡ1930.3.12. 동아일보 7면
간도 용정에서 소학교중학교 10여교 학생이 전후 8회나 시위만세를 불렀다. 전기 사건의 주모자 강짐득(姜朕得) 외 8명을 지난 6일 관령(馆令)위반으로 구류처분하다. 그들로는 방춘선(方春善), 석중금(石重金),김재명(金在明), 김중인(金重仁), 강응률(姜应律), 김명식(金明植), 장경학(张敬鹤), 임복만(林福万)등이다.
ㅡ1930.3.22. 동아일보 2면
학생사건으로10일 구류처분을 받은 각학교 학생 7명은 지난 15일에 만기출감되다. 이들은 이명식(李明植), 장경학(张敬学), 김중인(金重仁), 강응률(姜应律), 김재명(金在明), 임봉만(林凤万) 등이다.
그 시절《동아일보》와 《조선일보》를 통해 보여지는, 1930년 1월 하순부터3월 초순 사이 광주학생운동을 지지, 성원하는 룡정 중소학교 학생들 반일시위, 만세시위 운동 기사들이다. 이 기사들을 보면 룡정의 대성, 동흥, 은진, 명신, 영신, 명진 등 중학교들과 명신녀교, 광명고녀교, 해성소학교, 영신소학교, 광명녀학교 등 중소학교 학생들은 일제놈들의 거듭되는 검거와 탄압에도 불구하고 반일시위, 만세시위에 나선 모습들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1929년 11월 26일에 해란강반의 평강벌 투도구로부터 시작된 대중적 연변 학생반일시위운동은 이듬해 3월 초순까지 계속되였다. 1930년 3월 1일 이후에는 3.1운동 11돐기념시위에 합류되여 해란강 상류와 중류, 하류 지역들에서 더욱 세찬 파도를 이루었다. 앙가슴에 피끓는 청소년들이 이 연변학생반일시위운동의 전렬에 나섰다.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자는 분노의 함성은 천지를 진동하면서 온 연변이 부글부글 끓어번지였다.
연길 룡정 구간 모아산에서 보는, 룡정 세전이벌을 흘러 내리는 해란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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