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 · 潮歌网 www.zoglo.net
조선족글로벌네트워크 · 主播微信号:zoglo-net22
축복의 눈꽃 열창, <눈의 여왕>으로 거듭나다꿈만 같이 데뷔해서 30여 년간 떡방아 찧는 멜로디 속에 소복소복 내리는 축복의 눈꽃을 열창해 온 <눈의 여왕> 윤행성 가수가 일본 무대에 선다. 내년 1월 17일 도쿄에서 일본조선족경제문화교류협회(회장 박춘화)가 주최하는 <2025 세계조선족설맞이문예공연>의 화려한 메인무대에 올라 자신의 대표작 노래 <눈이 내리네>를 마음껏 열창하게 된다. 1980년대 말 90년대 초부터 조선족 가요계를 휩쓴 <눈이 내리네> 노래는 윤행성 가수의 독특한 창법으로 그 시대에 경직된 조선족 문화 연예계의 옷자락을 가만히 열어젖히며 “항간에서 가장 즐겨 듣고 가장 많이 불리는 앙코르가요”로 오랫동안 조선족 사회에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었다.그로부터 수십 년간 윤행성 가수는 가는 곳마다 “떡방아 찧는 소리 들려오더니/ 꽃가루 날렸느냐 마을에 눈 내리네…”라는 노래 가사처럼 소복소복 내리는 축복의 함박눈과 그 속으로 하얀 너울 쓰고 사뿐사뿐 걸어오는 새색시의 고운 이미지로, 또 명실공히 <눈의 여왕>으로 거듭났었다. 그도 그럴 것이, 노래는 첫 소절부터 윤행성 가수의 청아하고 섬세하며 심쿵한 목소리로 청취자들의 심금을 움켜잡기 때문이다.이 노래가 폭발적인 인기를 끌게 된 것은 “1990년도 한국에서 CD 음악을 취입할 때 김동진 작사, 최삼명 작곡으로 된 <눈이 내리네> 노래가 음반에 수록되었고, 또 한국에서 녹음한 그대로 연변 TV 방송과 라디오방송에 발표되면서 윤행성이란 이름이 더 청중들에게 각인된 것”이라고 그녀는 말한다. 윤행성의 노래에 귓맛을 들인 청중들은 그녀를 “조선족 주현미”, “조선족 엄정화”라고도 칭찬한다. 스타일이 다를지 몰라도 그만큼 청중들이 좋아하는 가수로 인지도가 높다는 얘기다.15년간 미국 이민 생활을 해온 그녀는 해외에서 생활하고 있는 조선족 동포들의 어려움과 고독, 그리고 소원을 너무 잘 안다. 그녀가 기자한테 말했다. “저도 가야지요. 중국과 일본, 한국에서까지 우리 조선족 연예인들은 물론, 동포 지성인들이 많이 모여 축제를 연다고 하니 얼마나 좋은 일인데요. 세계 어느 곳에 흩어져 살아도 우리는 한마음입니다. 조선족은 조선족이지요. 우리의 전통과 문화를 잊지 말고 계승해 나가야지요. 주최 측에서는 정말 잘하시고 있어요. 지금 무대에 오를 생각하니 가슴이 좀 떨리네요. 열심히 노래하는 좋은 모습 보여드리도록 약속할게요.” “정말, 너무 기대됩니다.” 기자도 고개를 끄덕였다. 인터뷰를 시작했다. 노래 <눈이 내리네>는 윤행성이 조선족 가수계에 쌓은 금자탑 중의 하나이다. 그 금자탑 위에는 세월이 흘러도 멎지 않는 “눈”이 계속 내린다. 그 “눈”은 인간 세상에 사분사분 뿌려주는 축복의 메시지이다. 산과 들에 소복소복 내리는 그 눈 속에는 떡방아 찧는 소리가 들려오고 이쁜이가 하얀 너울 쓰고 시집간다. 하늘 땅 그 어디에서도 “있더라도 가더라도 우리 다 같이 티 없이 살아보자.”라는 우리 민족 삶의 지조가 메아리친다.한 시대를 대표하는 가수는 흔히 그 자신의 대표작과 인생을 함께한다. 관중과 청취자들은 그 노래 이미지로 그녀를 기억하고 그녀의 노래를 흔상한다.윤행성 가수도 동감했다. “그렇습니다. 30여 년이 흐른 지금도 눈이 오면 생각나는 노래가 <눈이 내리네>이지요.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저의 이름도 떠올리는 실과 바늘 같은 관계가 되었죠. 그 후부터는 무대에서 제일 환영받은 가수로 활약했고요….”사실 그랬다. 1992년에 윤행성은 전국 소수민족 성악 콩클에서 통속창법 청년조 2등 상을, 2002년 8월 제1회 중국 전국 조선족 성악콩클 통속창법 1등 상을 수상했다. 또 2002년과 2003년에는 조선 평양 ‘4월의 봄’ 축제에 가서 두 차례나 금상을 수상했으며, 2004년에는 미국 터키재단의 초청으로 미국에서 공연을 하였고, 2007년 미국 뉴욕에서 이 노래를 메인으로 <윤행성 콘서트>를 열었다. 무대에서 <눈이 내리네> 노래를 들으면 관중들은 어디에서나 우뢰와 같은 박수를 쳐주며 앙코르를 외치곤 했다. 윤행성은 나름 <눈>의 신드롬을 만들 줄 아는 가수였다. 그녀는 대표작 <눈이 내리네>를 유행시킨 외에 “축복의 밤”, “들놀이가자, 꽃놀이 가자”, “봄행길”, “가더라도”, 그리고 근년에 부른 “고향 눈”, “뉴욕 아리랑”, “아내의 마음” 등 노래를 유행시켰다. 특히 주목해야 할 점은, 당시 연변의 TV 드라마의 주제곡은 윤행성이 도맡아 부르다시피 했다는 사실이다. “낳은 정 키운 정”, “민들레꽃”, “반달”, “갈꽃”, “가족사진”, “여자는 무엇입니까?”, “십오야의 밝은 달”, “어머니”, “인생길”, “사랑의 품” 등 TV 드라마의 주제가 또는 삽곡을 불러 드라마의 정서를 잘 전달해 주고 등장인물의 감정선을 강화해 시청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으며 드라마 주제를 부각하는데 기여를 했다.이 외에 한국에서 윤행성 <독창집>, <한중가요> , <꿈이 없다면> 등 3개의 CD앨범을 출판했다. 그중 '꿈이없다면' CD앨범에는 13개의 자작곡을 수록하였다.그래도 윤행성은 겸손하다. 시상식에 오르면 “항상 열심히 노력하는 모습으로 여러분께 기쁨을 드리는 윤행성이 되겠습니다.”라고 인사한다. “열심히 노력하겠다, 시청자들에게 기쁨을 드리겠다”가 그녀의 좌우명이었다. 청중(관중)들은 때로 노래 한 수가 어느 시대의 대표작으로 떠오르면 일생을 두고 그 가수를 기억한다. 그 가수가 부른 노래 가사와 음색 그리고 그 가수가 노래 부르는 모습까지 진한 향수로 남긴다. 그러나 그 가수가 가요계의 대표적인 가수로 성장하기까지의 여정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노래에 천부가 있다고 해서 다 가수가 되는 게 아니듯, 가수로 성장하는 데는 여러 가지 요소가 구비되어야 한다. 열심히 노력하는 진취심과 끈기, 소중한 인연 잘 맺기와 그것을 사회에 융화시켜 나가기, 나름 자기만의 좋은 이미지 흐트러짐 없이 꾸준히 구축하기 등, 그래서 기자는 윤행성 가수의 성장 스토리에 무척 흥미를 가졌다. 윤행성은 길림성 룡정현 개산툰에서 한 보통 노동자 가문에서 6남매 중 제일 막내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명절 때나 어른들이 모인 모임에서 노래 부르기를 좋아해서 다들 “애가 노래 너무 잘 부른다”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음악에 남다른 소질이 있어선지 그녀는 한번 들은 노래는 단번에 따라 부를 수 있었다. 당시 중학교에 문예 선전대가 있었는데 전정문 음악 선생님이 그녀의 끼를 발견하고 선전대에 와서 노래 부르게 했다. 그녀는 감회 깊은 어조로 말했다. “엄한 분이시고, 인재 양성에 혼신을 다하시는 분이셨죠. 정말 많은 예술 인재를 양성해서 음악학교에 보내주신 분이고요. 그 선생님한테서 처음으로 노래를 배웠었는데, 공연 때에는 저를 무대에서 독창도 시켰어요. 지금 생각하면 저의 계몽 선생님이셨던 거죠.” 개산툰이란 곳은, 워낙 작은 지방이라 소학교와 중학교가 한 청사에 있었는데, 학생 수가 점점 많아지면서 중학교가 분리되어 다른 곳으로 이전되어 가는 바람에 그녀는 더 이상 선전대 활동에 참여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다행히 얼마 되지 않아 소학교에도 문예 선전대가 있게 되었고, 당시 음악 선생님이 선전대의 기량을 제고시키기 위해 강한 훈련을 시켰다. 그 시절 그녀는 무용도 하고 노래도 하고 가야금도 배우고 하다 보니 정말 힘들었지만 그 모든 것을 참고 이겨냈었다. “가끔 공연이 있을 때는 연출 복을 자체로 해결해야 하는데 우리 가정 형편이 안 좋기에 색동저고리와 치마를 살 엄두를 못 냈지요.” 윤행성은 눈시울 붉혔다. “그래도 지혜로우신 어머님은 그때 말로 ‘광목천’을 색깔 별로 사서 저에게 색동저고리를 손수 만들어 입혔죠. 그래도 색동저고리를 입을 수 있어 너무 좋았어요.”솔직히 선전대 활동을 하면 즐거웠지만 학습 성적이 내려가니 부모님들은 그녀를 선전대에 못 나가게 했다. 그래서 음악 선생님이 여러 차례 끈질기게 설득해서야 계속 선전대에 다닐 수 있었다. 그런데 중학교에 가니 사회 형세가 바뀌면서 문예활동은 점점 뜸해지더니 아예 없어졌다. 원래 노래 부르기를 좋아한 그녀는 한번 부르기 시작하면 아는 노래를 죄다 불러야 끝을 본았다고 했다. 개산툰은 조선과 강을 사이 둔 거리여서 조선 라디오방송이 잘 들렸다. 그때 주로 조선의 유명 가수 최삼숙, 김옥선 두 분의 노래를 많이 듣고 모창을 하며 스스로 배웠다. 성악을 가르쳐주시는 선생님이 없다 보니 방송에서 흘러나오는 좋아하는 노래를 많이 따라 하면서 배웠던 것이다.“당시 중국의 유명한 가수 주봉박(朱逢博),이곡일(李谷一) 등 가수들의 노래를 많이 불렀어요. 짬이 나면 노래 부르는 저의 모습을 보시고 아버지께서는 수첩에 노래를 한 곡 한 곡씩 악보와 가사 그리고 그림까지 그려서 노래책을 만들어 주셨지요. 저의 아버지는 글씨를 정말로 예쁘게 잘 쓰셨고 그림도 잘 그리셨어요. 짬짬이 노래도 가르치셨고요. 소학교를 채 못 다니시고 음악 공부, 미술 공부도 한 적 없으신 아버지께서 어떻게 오선보도 보시고 그림도 잘 그리시고 하셨는지… 타고난 총명과 재주인 것 같아요. 가난에 두 어깨가 무거우시고 건강도 안 좋으시면서도 막내딸이 좋아하는 일에 보탬이 되어주고자 정성껏 적어주신 그 녹색 수첩을 저는 지금도 간직하고 있어요. 아버지의 흔적이 담긴 유일하고 소중한 선물이죠. 가끔 꺼내보곤 한답니다.”라고 아버지에 대한 좋은 추억을 얘기했다. <아버지가 만들어준 노래책>1980년 고중을 졸업하고 할 일 없던 윤행성은 개산툰 섬유공장에서 모집하는 직공 모집 시험에 합격하여 1981년에 섬유공장 직원이 되었다. 기업 문예 단체 활동이 빈번했던 시기라 전주 기업 문예 경연이 있을 때면 직장에서 문예 선전대 활동에 참여하여 경연에도 참여하였다. 당시 중국 음악이 경극에서 경음악으로 과도하는 시기였다.“연변 음악도 새로운 변화가 생겼죠. 연변 음악의 한 획을 그으신 저명한 작곡사이신 故최삼명 선생님의 아름다운 선율에 한국화 가수의 감칠 맛있는 노래가 중국 조선족 청중의 마음을 사로잡았죠. 가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부르는 그 가수의 노래는 저에게는 모델이었죠. <내 고향 오솔길>, <왜 물어보냐> 등 노래를 똑같이 모방하여 무대에서 불러 저도 관중들의 많은 박수를 받었어요. 그때부터 전업가수로 되려는 꿈을 키우게 되었죠.” 윤행성이 말을 이었다. “때마침 저에게 좋은 기회가 생겼어요. 당시 섬유공장 문예를 담당하신 김유식 선생님의 추천으로 연변에서 처음으로 꾸려진 허세록 경음악단에 잠시 조종되어 활동하게 되었죠. 그때 경음악단의 대부분 악사분은 룡정현 문공단 악사분들이었어요. 그렇게 처음 전업 단체 분들과 함께 공연을 하게 되었죠. 열심히 연습한 결과 무대에서 누구보다 환영을 많이 받았죠. 얼마 안 돼 경음악단은 해체되고 저는 다시 본 직장으로 돌아가게 되었죠. 하지만 이것이 제가 전업 단체에 갈 수 있는 지름길이 될 줄은 꿈에도 생각 못 했어요… 마침 룡정현 문공단에서 저에게 3개월간 함께 공연하자고 제안해왔어요. 그래서 3개월간 문공단의 전업가수들과 같이 한무대에 서게 되었죠. 생각 외로 무대에서 전업가수들 못지않게 관중들의 환영을 받았어요. 3개월간 계약이 끝나 저는 다시 공장으로 돌아갔어요. 이번에는 문공단에서 저를 가수로 입단시키겠다는 제안을 받고 돌아가니 너무 기뻐 발걸음도 가벼웠죠. 그런데 개산툰 섬유공장 공회에서는 문공단으로 조동하려는 저의 조동신청을 받아주지 않았어요. 부모님들도 제가 전직 예술단체로 가는 걸 썩 달가워하지 않았죠. 저는 꼭 전업가수가 되겠다는 의지를 굽히지 않았어요. 결국 문공단의 악단장님이 공회에 찾아오셔 설득해서야 정식 조동 수속을 밟을 수 있게 되었죠.”1984년 1월 윤행성은 드디어 룡정현 문공단의 전직 가수가 되었다. 너무나 기뻤고 행복했다. 시대가 영웅을 낳는다는 말처럼 사실 자기는 시대를 잘 만났기에 전업가수로 활동할 수 있게 된 행운아이다고 말했다. “정말 꿈만 같았어요. 스무살 먹도록 피아노를 직접 보지도 못한 제가 문공단에서는 매일 쳐볼 수 있고 만져도 보고 쳐다볼 수도 있었죠. 저는 여기서 꿈을 펼쳐보려는 욕망을 가졌어요. 음악을 체계적으로 배우지 못한 저로서는 꿈같은 현실이었고 행복한 마음에 더 열심히 노력했죠. 저의 노력을 이쁘게 보셨는지 저에게 대만 가수 등력군의 녹음테이프를 주신 분이 있었어요. 말로만 들어왔던 가수의 노래를 듣는 순간 저는 놀랐어요. 어쩜 그렇게 부드럽고 아름답게 부를 수가 있을까? 저는 그 테프에 수록된 노래를 모두 배워냈죠. 저의 음성에 가까운 목소리여서 숨소리, 콧소리까지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배워냈죠.”윤행성은 1984년 겨울 고향 집에 갔다가 행운을 만났다. “아버님은 저를 보더니 ‘연변텔레비죤방송신문’을 제게 건네면서 신문에 전주 1차 마이크식 통속창법 콩쿠르 광고가 실렸는데 한번 도전해 보라고 권고했어요. 길고 짧은 건 재봐야 한다고 전 생각 끝에 용기를 내어 신청했어요. 결과 생각지도 못하게 제가 1등 상을 받게 될 줄이야! 정말 기뻤죠. 마지막 결승전 때 룡정현문공단 작곡가 김락춘 선생님이 작곡하신 <들놀이 가자, 꽃놀이 가자> 노래를 불렀죠. 그 노래가 방송에 실리면서 많은 분들이 따라 부르게 되었고, 그래서 저는 무명 가수로부터 두각을 나타내게 되었죠.”이때 윤행성한테는 마침내 귀한 인연이 찾아왔다. 콩쿠르 때 평심으로 오셨던 최삼명 작곡가가 그녀한테 연변 TV 예술영화 <낳은 정 키운 정>의 주제가를 부르면 목소리에 잘 어울릴 것 같다면서 출연을 제안해 왔었다. “저는 놀랐어요. 꿈만 같았어요. 이런 좋은 일이 나에게 차례지다니? 저는 연신 ‘고맙습니다. 열심히 부르겠습니다.’라고 감격해 말씀드렸죠. 그렇게 86년도에 <낳은 정 키운 정>의 주제가와 삽곡을 불렀고, 이어 87년에도 <민들레> 주제가와 삽곡도 불렀죠.” 1987년에 윤행성은 최삼명 선생님의 추천으로 연변 가무단으로 전근해서 독창가수로 활약하면서 많은 관중들의 호평을 받았다. 1989년에 윤행성은 할빈 문화관에서 주최한 미국 공연에 참가하였다. 1990년 한국에 가서 CD 음악을 취입할 때 김동진 작사, 최삼명 작곡으로 된 <눈이 내리네> 노래를 음반에 수록하는 행운을 가졌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연변 TV 방송과 연변 라디오방송국에서 한국에서 녹음한 그대로 이 노래가 발표되면서 ‘윤행성’이란 이름이 청중들에게 깊이 각인되었다. “그래요, 최삼명 선생님은 저를 스타덤에 올려주신 은사이죠… 30여 년이 흐른 지금도 눈이 오면 생각나는 노래가 <눈이 내리네>이고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저의 이름도 떠올리는 실과 바늘 같은 관계가 되었죠.” 그녀가 감개무량해서 말했다. 그때부터 윤행성은 무대에서 제일 환영받은 가수로 활약했다. 위에서 밝혔듯 전국 소수민족 성악 콩쿠르에서 통속창법 청년조 2등 상, 조선 평양 4월의 봄 축제의 두 차례 금상 등을 수상하며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열심히 살며 봉사하며 좋은 세상 함께 만들어가고 싶어요”“가수에게는 사회적 의무와 책임이 있지요.” 윤행성이 진지하게 말했다. 아무리 유명한 가수라고 해도 무대에 저절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다. 본인 노력의 산물이기도 하지만, 스승님의 가르침과 관중(청취자)과 팬들의 지지, 그리고 스태프들이 든든히 받쳐준 결과물이다. 그런 것을 항상 고맙게 가슴 깊이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그녀는 겸손할 줄 알고 아무리 힘들더라도 즐겁게 노래를 부를 줄 안다. 또 봉사할 줄 알았다.연변 땅 곳곳에 <눈이 내리네> 신드롬이 일 때 윤행성은 뜻밖에 미국으로 이민했다. 그녀는 미국에 가서도 중국 동포사회는 물론, 한인사회에서도 인정받는 가수로 활동했다. 조선족 동포 이민자들의 고달픈 마음을 달래주고자 봉사를 마다하지 않았다. 주뉴욕 한국일보는 2004년 1월 20일 자에 “북한 어린이돕기 자선 음악회 성황”이란 제하의 기사에 “북한과 연변 어린이들을 돕기 위한 자선 음악회가 사랑의 터키 한미재단(회장 전상복), 뉴욕 한국일보 특별 후원으로 17일 플러싱 서울 플라자 크리스탈볼룸에서 성황리에 열렸다”며 이날 행사에 정권호(테너), 김수정(소프라노), 임오혁(테너),안부림(바이얼린) 등 뉴욕 정상급 음악가들과 연변의 인기가수 윤행성, 오금세씨가 초청돼 가곡, 오페라 아리아, 중국 노래 등을 들려준 뜻깊은 무대를 선사했다고 전했다. 특히 제2부에서는 “연변 가수 오금세, 윤행성씨는 조선족 동포들이 대거 참석한 19일 뉴욕 음악회에서 자신들의 노래와 중국 노래 등 여러 곡을 선사, 뉴욕 동포들과 조선족 친교의 밤 행사이기도 한 이날 자선 음악회를 뜨겁게 달궜다.”며 “윤행성 가수의 섬세한 발라드부터 강한 비트의 노래까지 모든 장르(블루스, 펑키, 라틴)를 자신 특유의 감성과 따뜻한 음색, 그리고 혼이 담겨 있는 독특한 목소리로 관중을 매료시켰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2007년 2월 4일 뉴욕에서는 조선족 동호회와 뉴욕 연예인협회가 윤행성 콘서트를 개최했다. 이에 이성렬이라는 조선족 동포는 기사에 댓글을 달아 윤행성의 업적을 소개한 후 이렇게 썼다. “그녀는 행성(行星)이란 이름에 어울리게 용모나 마음씨 또한 예쁘고 착한 사람으로 우리 조선족의 자랑이고 영광이다. 특히 미국에 와 있는 조선족들의 자랑이고 영광이다. 지난해 조선족 운동회 때 윤행성씨가 선수들에게 콜라 한 캔씩을 나눠줬는데 ‘아, 참, 미국에 오니 윤행성씨의 손도 잡아볼 수 있고….’, ‘…이게 바로 윤행성씨가 준 그 콜라야!’라며 감격해하던 조선족 선수들의 모습이 아직도 눈앞에 선하다. 그런 그녀이기에 미국에서 조선족으로선 사상 최초로 개인의 콘서트를 열게 된 것이다… 조선족으로서, 사실 남의 나라에 와서 살면서, 우리 민족의 전통적인 노래와 춤을 포함한 우리의 고유한 문화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는 것은 일종의 자랑이고 긍지이다. 정말로 대견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그때의 행사를 보도한 코리아타운 연변주간도 “미국서 콘서트를 연 조선족 가수 윤행성”라는 제하의 기사에서 이렇게 썼다. “떡방아 찧는 소리 들려오더니… 청아한 노랫소리가 얼마 전 미국 뉴욕 플러싱 코리아 빌리지 열린 공간에서 울려 퍼졌다. 조선말로 된 노랫소리는 이국 타향에서 삶에 부대끼다 오랜만에 운집한 동포들의 마음 한 자락을 습윤하게 적셨다. 조선족 동포 400여 명이 공연장을 가득 메운 가운데 열창하는 가수는 바로 윤행성이었다….”2020년 초, 미국 이민 생활을 접고 연변에 돌아온 후에도 윤행성은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그때 중국 ‘연변 TV 2020년 음력설 야회’ 주최 측은 “봄이 오는 소리”라는 타이틀로 “만물이 소생하고 새로운 한 해를 기약하는 봄”을 주선율로 70년 동안 연변조선족자치주가 거둔 성과를 반영하는 데 초점을 맞춰 음력설 공연 조목을 준비했다. 특히 길림, 심양 등 지역의 조선족들이 설을 쇠는 모습을 보여주며 전 세계에서 활약하고 있는 조선족들의 생활을 방영하고자 했다. 물론 윤행성 가수도 초대됐다. 연변 TV 사회자가 방송을 진행했다. “떡방아 찧는 소리 들려오더니 … 조선족이라면 한 번쯤은 들어봤을 그 노래, 그리고 들어봤을 그 이름-윤행성, 15년 만에 고향을 찾은 윤행성 가수가 부르는 추억의 그 노래 ‘흰 눈이 내린다’로 여러분의 향수를 자극합니다.”연변의 조글로 미디어도 “‘흰 눈이 내리네’ 등 수많은 명곡을 불러 관중들의 사랑 속에 20여 년간 연변의 무대에서 활약했던 윤행성씨, 15년간의 미국 생활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라고 소개했다.고향은 그녀를 잊지 않았고, 그녀도 그동안 고향 사람들한테서 받은 사랑을 잊지 않고 고스란히 돌려주고자 했다. ‘낙엽귀근(落叶归根)’이라는 말이 있다. 그녀는 사랑의 귀근-낙엽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다.세상의 온갖 풍파를 겪으며 가수 인생을 살아온 그녀는 항상 남 앞에서 저자세로 자신을 낮추고 있다. 현재는 고향 연길에서, 아주 작은 교실에서 1:1 수업과 10명 좌우되는 단체 수업을 하고 있단다. “그냥, 조용히 하고 있어요.” 그녀가 미소했다. 2013년 11월 2일 중앙인민방송국 조선말방송에서 기자는 <노래에 깃든 이야기>라는 제하의 프로그램을 통해 “새하얀 눈송이에 담은 깨끗하고 소박한 염원- 눈이 내린다”라는 프로그램을 편집했다. 사회자와 연변의 유명한 석화 시인의 대담으로 이뤄졌다.사회자는 “사자 성구에 ‘물유각주(物有各主)’란 말이 있습니다. 풀이하면 ‘세상 모든것엔 그 임자가 따로 있다’는 말이 됩니다. 좋은 노래가 만들어지는 과정은 가사, 선율, 가수라는 세 가지 방면이 모두 훌륭하게 어울려져서 완벽한 조화를 이뤄내야만 비로소 완성되는 종합성적인 예술 창조 과정입니다. 이렇게 가사, 선율, 그리고 가수가 함께 완벽한 조화를 만들어낸 작품이 있습니다. 오늘은 그 노래를 준비했습니다”라고 말한 후 <눈이 내리네>란 노래를 방송했다. 석화 시인이 말했다. “이 노래를 들으니 새하얀 눈이 바로 눈앞에 흩날리는 느낌이 드는 노래입니다.” 사회자가 호응했다. “한 수의 가사는 노랫말에 어울려야 되고… 그런 얘기를 들었어요. 가사가 몸체라면 선율은 날개, 가수는 목소리를 통해 청취자들 가슴속으로 전해주고… 이렇게 맞아야 명곡이 탄생이 되고 청취자들도 선호하고 호평받는 노래가 나오지 않을까 생각됩니다.”석화 시인이 이 노래 탄생에 깃든 이야기를 했다. “이 노래는 방금 말씀하신 것처럼 가사, 곡, 그리고 가수 세 방면이 모두 자기 임자를 찾아가는 과정에 최후로 완성된 노래다 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먼저 가사가 쓰인 경우부터 얘기할까요? 작사자는 김동진 시인입니다. 이 노래 가사는 1982년 겨울, 북국의 어느 편벽한 현성 사무실에서 씌어졌지요. 16년이라는 교직 생활을 정리하고 녕안현조선족문화관 관장으로 부임한 김동진 시인은 현성에 온 후 처음 맞는 겨울의 하얀 풍경에 가슴이 설렜습니다. 창밖에서 흩날리는 흰 눈은 깨끗한 유혹이었지요. 무엇인가를 적지 않으면 잠을 이룰 수 없는 충동으로 다가왔지요. 당시 그의 잠자리는 청나라 때의 낡은 건물 2층 사무실 구석에 놓인 간이침대였습니다. 시골에 처자를 남겨둔 채 홀로 현성에 들어와 기관 식당의 밥을 먹고 단위에서 자면서 독신생활을 하고 있던 시인은 고생스럽기는 했어도 하루 일을 마치면 조용한 환경에서 독서하고 사색할 수 있는 시간이 많아서 좋은 점도 있었습니다.어느 날 밤, 그는 ‘눈이 내린다’는 제목으로 가사 한 수를 쓰려고 작심했습니다. 하지만 막상 필을 들고 보니 무엇을 어떻게 써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지요. 머릿속에는 온통 "흰 눈, 쌀눈, 복 눈, 함박눈, 풍년 눈, 배꽃 같은 눈, 떡가루 같은 눈, 거위 털 같은 눈…이런 단어들이 흩날리는 눈꽃처럼 란무했습니다. 이런 단어들 속에서 추려내는 것입니다. 이 속에서 아름답던 동년을 생각하고 동년 속에서 가장 아름답던 풍경, 바로 어머니와 같이 떡방아 찧던… 설이면 떡방아 간에 가던 떡가루 같던 눈, 그리고 이웃집 누나가 시집갈 때 흩날리던 꽃가루 같던 눈으로 주제가 잡혔습니다.그래서 ‘떡방아 찧는 소리 들려오더니, 떡가루 날렸느냐 마을에 눈 내리네…’라고 쓰기 시작했지요. 그런데 그 작품은 1984년 6월호 <은하수> 잡지, 당시 목단강에서 발행되던 간행물인데, 6기에 실렸지요. 누가 관심하는 작곡가가 없었는데, 다행스럽게 이 가사가 연변 가무단의 저명한 작곡가 최삼명 선생님 마음에 들었지요. 비로소 최삼명 선생님의 마음에도 흰 눈이 내렸습니다. 작곡가는 검반위에 선율을 날렸지요. 그러나 이는 악보 상태일 뿐, 노래는 지면에 악보로 찍혔을 뿐, 노래로 아직 되지 않았습니다. 세월이 흘러가도 노래로 완성되지 않고 잡지는 창고에 묻혀있고, 시인도 ‘이 가사는 이렇게 끝나버리는구나’하고 미련마저 버렸답니다. 그런데 수년이 흐른 후 어느 날 이 노래가 라디오와 텔레비전에서 울려 퍼지더니 삽시에 수많은 사람들이 사랑하는 애창곡이 되어버릴 줄이야! 바로 윤행성 가수가 이 노래를 부른 것입니다.”.드디어 가사에 훌륭한 곡이 붙여지고 비로소 알맞은 가수를 찾은 것. 윤행성도 당시의 에피소드를 이렇게 전했다. "1990년 초반, 제가 한국에서 노래를 취입하게 되었는데 곡이 없었어요. 마침 한국에서 음악하시는 분이 한국화 가수한테서 들었다며 '눈이 내리네'를 불렀으면 좋겠다고 추천하길래 급히 최삼명 선생님께 전화해서 곡을 부탁했지요. 최선생님으로부터 팩스로 받은 <눈이 내리네> 곡을 부랴부랴 취입하여 앨범의 마지막 곡으로 완성하였는데, 이렇게 좋은 곡이 저한테 차례져서 얼마나 다행인가 하고 정말 기뻐했어요. 함께 작업하던 한국 음악가들도 '이처럼 좋은 노래가 있는가? 가사와 곡 자체가 너무 투명해서 중국 연변의 하늘까지 맑아 보인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지요. 그래서 전 너무 행복했었습니다."비로소 "물유각주", 각자의 임자를 찾아가 훌륭한 작품으로 재탄생한 것이다. 윤행성 가수도 비로소 연변 가수계의 스타로 새별처럼 떠오를 수 있었다. 윤행성 가수가 인터뷰를 갈무리했다. “일본 도쿄 무대에 올라 다시 <눈이 내리네>를 부를 수 있다니 그날이 너무 기대됩니다. 우리 조선족은 한 마음입니다. 지성인들부터 서로 손을 잡고 조선족 사회를 키워나가야 우리의 마음도 삶도 풍족해지고 의미가 있게 될 겁니다. 일본조선족경제문화교류협회가 이 몇 년간 너무 잘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글로, 우리의 노래로, 그리고 우리의 끼로 세계에 흩어져 살고 있는 우리 조선족들의 마음을 하나로 이어놓고 있네요. 그래서 저도 미비한 힘이나마 보태고 싶어요. <눈이 내리네>로 우리 조선족 관중과 청중들에게 항상 축복을 보내드리고 싶습니다.” 기자도 도쿄 무대에 오를 윤행성 가수의 그날을 기대하며 축복해주었다.<축복의 밤/축하의 노래>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