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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언덕 위의 장례식
김혁
덕이가 죽었다.
일곱 살 덕이가 죽었다.
이삿짐을 부리느라 인부들과 함께 짐을 나르는 동안 잠깐 방치한 사이, 덕이가 길거리로 뛰쳐나갔고 순간 로드킬을 당했다. 하필이면 겨울잠에서 깬 심산 속 짐승같이 덤턱스럽게 덩치 큰, 장거리를 뛰는 짐실이 트럭에 치였다. 운전실에서 쑥대강이 같은 난발의 얼굴이 쑥 나와 이쪽을 기웃거렸다. 트럭은 잠시 멈추는 듯하더니 그대로 도망가 버렸다. 입에서 선지피를 철철 흘리는 덕이를 껴안고 나는 트럭의 꽁무니를 멍청하니 지켜보았다. 경황 중에 차 번호판이 기억나지 않았다. 그저 맨 뒤의 숫자가 7이었던 것 같다.
어쩌면 고향에는 동물병원조차 없었다. 황급히 택시를 불러 잡아타고 내가 금방 떠나온 도회지 Y시로 달려갔다. 동물병원으로 달려갈 때까지만 해도 덕이의 몸은 따뜻했고 아직 들숨을 헉헉 몰아쉬고 있었다. 꼭 마치 싫증을 모르고 내가 던져준 공을 물고 다시 천방지축 달려올 때 할딱이던 모습 그대로였다.
하지만 막상 동물병원에 도착했을 때 숨기운이 모자란 듯했고 이어 흰 가운의 의사가 하는 말은 “댁의 강아지는 이미…… 무지개다리를 건넜습니다”였다. 반려동물의 죽음을 두고 ‘무지개다리를 건넌다’고 표현한 글을 많이 보아 왔었다. 죽음에 대해 너무나 낭만적인 표현이 아닌가 생각했는데 막상 그 말을 듣는 순간 콧잔등이 매콤해지고 눈확에 붉은 기운이 확 몰려드는 것을 나는 느낄 수 있었다.
젊은 여직원 하나가 덕이를 부대에 싸주었다. 동물병원의 이름과 로고가 새겨져 있는 부대에 장방형의 형태로 길쭉하니 정성스레 싸주었다. 그 길쭉한 부대를 안고 나는 동물병원의 대기실 의자에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덕이는 아직도 따뜻했다. 오후까지만 해도 짐실이 차의 조수석에서 내 품에 안겨 핑크빛 혀를 홀짝홀짝 내밀며, 두 눈을 빛내며 들떠 했던 덕이였다. 그런 덕이가 고향에 도착하기 바쁘게 황급히도 무지개다리를 건너 버렸다.
집에 돌아와서 채 풀지 못한 짐 더미 속에 앉아 버렸다. 꺼스스 땅거미가 내렸고 불을 켜지 않은 방에서, 빙동어물 같은 커다란 짐들 사이에 덕이를 껴안고 나는 멍청하니 앉아 버렸다. 어쩌면 불길하게도 이사 첫날에 이런 변고를 당한 것이다.
덕이는 아버지가 키우던 개였다. 산책길에 누군가 음료 상자에 넣어 언덕 아래 길녘 벤치 위에 버린 유기견을 보고 아버지가 안아다 3년간 키웠고, 간암으로 투병 생활을 하시던 아버지가 유언으로 덕이를 맡아 잘 키워 달라고 하신 간절한 부탁도 있어, 그 후 내가 4년을 키웠던 반려견이었다. 사실 덕이는 별 볼 것 없는, 시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개다. 누런색 바탕의 거무튀튀한 털, 눈가까지 축 늘어진 파초잎 부채 같은 귀, 하지만 마냥 간절함으로 가득한 초롱초롱한 눈, 고향 사람들의 방언 그대로 말하면 똥개, 그저 그런 구순한 개였다.
주변에 명견을 키우는 이들이 많았지만 아버지는 임종 전까지 이런 덕이에게 모든 것을 바쳤다. 퇴직비를 아껴 쓰며 그렇게 좋아하던 술안주도 모두부 반 개면 다였지만, 덕이에게는 마냥 비싼 사료에 일 주일에 한 번씩은 개 통조림을 사 먹이곤 했다. 자신을 졸졸 따라나서며 다리에 감겨들곤 하는 개가 귀여워 때때로 동그란 머리통을 다독여주고 털을 쓸어주었고, 하는 짓이 이뻐서 퇴근 후 맥주병과 함께 사 들고 온 북어를 찢어 선참 입에 물려주기도 했다.
아버지는 이 자그마한 현성에서 중학교의 역사 교원이었다가 그 후 당안관1)직원으로 일하셨다. 어머니는 현성의 문공단2) 의 민요 가수였다. 아버지가 편찬, 출간한 지방지의 출간 기념 파티에서 어머니가 축하 공연으로 민요를 불렀다. 그때 어머니는 함경북도에서 유전된 「새 타령」을 불렀다고 했다. 아버지는 그런 어머니에게 반해 버렸다. 두 분은 이 유서 깊은 현성의 동쪽 더기 아래에 둥지를 틀었다. 그리고 비익조처럼 이곳에서 꼬박 30년을 붙어 지냈다.
그러다 우리 말 노래와 춤으로 한때 현성, 나아가 인근 도시에까지 이름을 드날리던 문공단이 자금난에 휘청이다가 더는 예술의 맥을 잇지 못하고 해산되었고 어머니는 Y시로 나와 버렸다.
대학을 나온 내가 Y시의 어느 문예지에 편집자로 일하고 있어 어머니는 아들 곁으로 가려고 했지만 아버지는 부득부득 고향을 뜨려 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백오십 년 전에 한인 이주민들이 일군, 현성을 에둘러 논밭이 무연히 펼쳐져 있고 시가지 복판에 아직도 백여 년 전에 판 용두레를 얹은 우물이 있는 이 현성을 사랑했고, 이 현성에 관한 이주사를 편찬해 오고 계셨다. 내가 잡지사 선배와 주필의 힘을 빌려 Y시의 전문 문헌 편집을 하는 기관으로 전근을 주선했지만 아버지는 단박에 거부한 채 기어이 고향에 남아 버렸다. 탯줄 묻은 고향에서 일제가 지은 오래된 건물을 빼앗아 만든, 청회색 벽체에 주홍색 대문과 창틀의 고색창연한 당안관을 아버지는 뜨려 하지 않았다. 그만큼 아버지는 문헌 편찬이라는 이 직업을 사랑했다. 그렇게 누구나 한다는 흔한 주임 자리에도 못 오른 채 말단직원으로 있으며 정년퇴직할 때까지 십여 년간 홀로 고향에 계셨다. 퇴직 후에도 당안국의 후배들을 도와 여러 역사 문헌들의 편집을 맡아 무료로 편찬해 주셨다.
덕이는 일곱 살, 인간의 나이로 치면 마흔두 살, 중년의 개였다. 어쩌면 나의 나이와 똑 닮았다. 그러고 보니 덕이를 치고 뺑소니를 한 차 번호의 끝 숫자도 7이다. 뜻밖에 들이닥친 변고에 나는 어쩔 줄을 모르고 부대에 길쭉하니 싸인 덕이를 집 복판에 뉘어 놓고 그 앞에서 날을 지샜다.
나의 머릿속처럼 하얗던 창밖이 붉은 홍조처럼 물들어 왔다. 이삿짐에 기대어 새벽녘에 겨우 눈을 붙였다가 인차 잠에서 깼다.
이제 덕이를 묻어야겠다는 생각이 늦은 더듬이처럼 나의 피로로 흐리터분해진 머릿속에 스멀거렸다. 묻을 도구 같은 것이 없었다. 요즘의 도시 사람들이 거개가 그러했고, 나 또한 명색이 시인, 편집인이라 삽이나 괭이 같은 시골에서나 볼 법한 도구들을 집에 갖추어 놓은 적이 없었다. 서성거리다가 다시 덕이를 품에 안아 보았다. 엊저녁 따뜻했던 기운이 많이 사라진 듯했다. 울컥 눈물이 나왔다.
쟁기를 빌려볼 양으로 집을 나왔다. 그러다가 덕이가 쫄래쫄래 내 뒤를 묻어나오는 환영에 꺼둘려 피끗 뒤를 돌아도 보았다. 하지만 덕이는, 부대 속에 장방형으로 누운 덕이는 현관에 그냥 누워만 있었다. 울컥하는 마음을 간신히 억누르며 나는 집을 나와 언덕을 내렸다.
아침의 길거리는 호젓했다. 이른 절기치고는 날씨가 너무도 쨍쨍하여 청명한 아침이다.
막상 돌아와 본 고향 현성은 이미 퇴락했다. 원체 인구 수십만 명이었다가 이제는 겨우 오륙만 명에 지나지 않은 현성이었기에 길거리에는 사람이 적었다. 때로 나는 고향의 거리를 거닐다 어느 영화 촬영장의 사극 세트장을 오지 않았나 하는 환각에 사로잡힐 때도 있었다.
이른 아침이었는데 저 앞에 사람이 보였다. 기와 지붕에 하얀 회벽, 어딘가 구한말의 고풍이 엿보이는 아담한 한옥 앞에서 노인장 한 분이 빗자루를 들고 집마당에서부터 거리로 이어가며 쓸고 있었다. 그리고 노인장은 하얀 한복 차림이었다. 춤사위처럼 오르내리는 어깨, 그 모습이 막 죽지를 접으려는 학처럼 보였다.
인기척에 노인장이 숙였던 허리를 폈다. 짧은 머리칼에 깡마른 체격, 깊은 눈매에 형형한 눈빛, 고집스럽게 쭉 곧은 콧날, 하늘 향해 쳐들린 카이저수염, 굳은 의지를 보여주는 듯한 한일자의 큼직한 입, 어떤 아우라를 주는 인상에서 바위보다 더 육중한 무게가 느껴졌다. 그 아우라에 노인 앞에 채 다가가기도 전에 나는 허리를 깊숙이 숙이며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저는 금방 저 더기로 이사 온 당안관 김 선생의 아들입니다.”
노인장의 조소(彫塑) 같던 굴곡진 얼굴에 반색하는 기색이 어렸다.
“김수근 선생의 버려두었던 자택으로 누군가 이사를 온다고 하더니 다름아닌 그 자제 분이셨구려. 반갑네. 나 규암일세.”
“아, 규암 선생님!”
노인장이 손을 내밀었고 나는 덴겁히 그 손을 받았다. 큼지막했고 따뜻했다. 아버지가 편찬한 지방지의 인물편의 맨 첫 사람으로 소개된 분이었다.
규암 선생은 현성에서 20리 남짓 떨어져 있는 전설이 깃든 명동촌의 지탑을 잡은 분이자 그 이름을 따서 지은 학교의 교장이셨다. 그는 일제의 횡포에 전 북간도가 떨쳐 일어나서 벌인 3·13 시위의 선두주자이자 온 북간도 사람들이 애대하고 따르는 거두였다. 그이가 일제가 불태워 버린 명동학교를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 지은 일화는 이곳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다 알고 있었다.
“어찌 그 좋은 도회지를 두고 이곳으로까지 이삿짐을 싸셨는가…….”
노인장이 빗자루에 두 손을 얹은 채 물었다.
잠깐 머뭇거리다가 내가 말했다.
“제가 일하던 잡지사가 폐간이 됐습니다.”
“어허!”
노인의 입으로 나지막한 탄성이 새나갔다.
“그래서 귀향을 결심했습니다. 저도 이젠 불혹의 나이라 어찌할지 헤매다가 아버지가 계셨던 이 고택이 떠오르더군요. 여기서 지친 몸을 기대고 싶었습니다. 아버지도 저도 우리 역사를 소환하고 우리 말을 잇는 일을 했던 사람으로서 고향으로 돌아와서 아버지의 온기를 되찾고 정기를 받고 싶었습니다.”
나는 문뜩 이 노인장에게 가슴속 깊은 곳에 울기(鬱氣)로 가득 찬 그것을 모두 토파하고 싶어졌다.
노인장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규암 선생은 독락(獨樂)하는 듯한 표정으로 소리 없는 미소를 머금고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이윽고 노인장이 입을 열었다.
“자제분도 알다시피 일제에 나라를 잃은 우리가 산 설고 물 설은 북간도 땅 여기까지 흘러와서 뿌리를 내린 지도 제법 많은 세월이 흘렀네. 그 와중에 많은 사람들은 나름대로 우리만의 길을 찾아보려고 많은 애를 써왔지. 하지만 이제 우리 세대에게는 오로지 쇠잔한 고통과 비애만이 남아 있을 뿐이네. 그 숭악한 일제에게서 목숨을 대가로 지켜 온 학교들이 연줄로 폐교되고, 우리 말본 잡지들도 폐간되고, 이런 준엄한 처경에도 사람들은 우리의 선친들이 일군 논밭도 버리고, 기둥을 세우고 서까래를 얹었던 집도 버린 채 타지로, 해외로 뿔뿔이 흩어져 버리는 현실일세. 이 고통과 비애를 물리치고 이 민족의 흥성을 되찾는 막중한 임무는 이제 자네들 세대에게 넘겨졌네. 우리 세대는 이젠 마음이 있어도 무엇을 어떻게 해볼 기력이 없네. 과연 자네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겠는가?”
노인장이 채문하는 사람처럼 나를 빤히 지켜보았다. 나는 답을 구하는 승려인 듯 그 눈길을 간절히 우러르었다.
“우리가 채 이루지 못한 바이지만 자네들에겐 선량하고 앞길 잃은 우리 민족에게 우리의 혼을 이어 주어야 할 책임이 있네. 여태껏 그저 묵묵히 숙명처럼 살아온 우리가 풍진 세상을 바로 볼 수 있는 힘을 길러주기 위해선, 아래 세대에게 우리의 뿌리와 그 혈맥에 대해 잊지 않게 해주어야 할 의무가 있네. 이면에서 자네의 부친 김수근 선생은 주어진 자기 생을 참답게 사시다 가신 분이라 할 수 있지.”
규암 선생의 음성은 놋그릇을 두드리듯 짜랑짜랑했다. 숙연한 표정으로 선생의 말을 들으며 나는 아버지가 내게 마냥 했던 이와 꼭 같은 말을 떠올리고 있었다.
“뜻을 가진 젊은이를 만난 듯해, 내가 아침부터 말이 다사해졌구먼.”
노인장이 다시 빗자루를 들고 길을 쓸기 시작했다. 그제야 나도 쟁기를 빌리려 나섰던 일을 떠올리고 문칮거리다가 물었다.
“저 혹시 댁에 삽 같은 것이 없나요?”
규암 선생이 의혹이 묻은 눈길을 들어 나를 바라보았고, 나는 이사를 온 어제 애견을 잃은 이야기를 간추려 말했다. 애견을 묻으려는데 마땅한 쟁기가 없다고 했다.
“쯧쯧, 어쩜 이사 오자마자 그런 변고를 당했구려. 김수근 선생이 날마다 그 강아지를 앞세우고 언덕길을 산책하는 걸 보아왔었는데, 그런 애견을 잃었으니 아무리 미물일망정 그 마음이 어련하시겠나! 저기 언덕 위에 좋은 터를 찾아 묻어 주시게.”
규암 선생이 연신 쯧쯧 하고 혀를 차면서 댁으로 들어가서 곡괭이 하나를 들고 나왔다. 손잡이가 손때에 반질반질하고 날이 모지라진 몽당 곡괭이였다.
“아직 해토 머리라 땅이 다 풀리지 않아 힘들 터이니 삽보다 곡괭이가 더 마땅할걸세.”
곡괭이를 내게 넘겨주면서 규암 선생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래 봬도 하잘것없어 보이는 이 곡괭이가 우리 선친들이 이 동토의 땅을 파서 일구었던 쟁기라네.”
나는 소중히 곡괭이를 두 손으로 받아들었다.
곡괭이를 메고 돌아서는 나의 뒤에 대고 규암 선생이 한마디 했다.
“이제 나도 고희를 넘긴 늙은이라 적적하니까 자주 들렀으면 좋겠네.”
규암 선생의 이마에는 깊숙한 주름살이 몇 줄 골을 이루고 있었다. 그 쇠잔한 모습에 생전 아버지를 보는 듯해 나의 마음 한 자락이 아련해졌다.
“네.”
다시 집이 있는 언덕을 오르는 나의 눈에 ‘제창병원(濟昌病院)’이라는 세로로 걸린 나무 간판이 보였다. ㄱ자형 회색 양옥으로 된 건물, 옥상 아래에 알전구가 달리고, 그 아래 튼실한 목제 간판이 걸린 병원은 아버지의 집, 이제 내가 살게 될 집과 이웃이었다. 제창병원은 영국에서 온 선교사들이 설립한 병원이었다.
몇 해 전 「제중원」이라는 한국 드라마가 무척 인기를 끌어 온 집식구가 함께 손꼽으며 기다려 보았는데, 한국 최초의 근대식 병원인 제중원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활극을 그린 드라마의 스토리는 이곳 제창병원의 이야기와 닮은 데가 있었다. 그 사극처럼 고향의 영욕 그리고 애환과 함께한 제창병원의 이야기도 무척이나 드라마적이었다.
이 병원에서는 찾아오는 가난한 환자에 대해서는 무료로 치료했으며, 순회 진료도 시행하여 오지에 있는 한인촌을 찾아다니면서 환자들을 치료해 주었다.
병원은 또 독립운동가들의 피난처로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반일 무장단체의 부상병들을 받아들여 치료해 준 곳이었으며 특히 이 병원 지하실은 북간도의 「독립선언서」와 《독립신문》이 인쇄된 곳이었다. 더욱이 고향에서 3만 명이 운집해 펼친 3·13 반일 시위운동 당시에는 일본 군경들의 총칼 아래 쓰러진 독립 투사들의 시체 안치소 및 부상자 치료소로도 이용되었다.
마틴을 비롯한 병원의 의사와 선교사들은 선명한 태도로 민족독립운동과 반일운동에 투신한 조선인들을 지지해 주고 돌봐주었다.
청산리대첩에서 독립군에게 참패한 일본군이 보복의 칼날을 뽑아 들고 이곳 장암촌에서 한반도를 놀라게 한 간도참변을 일으켰을 때 그 피비린내 나는 현장에까지 달려가 조사를 하고 한인들을 대량 학살한 현장 사진과 조사문을 캐나다 해외선교부에 보내 유럽 사회에 일본군의 잔인한 본성과 야만적 행위를 폭로했던 그들이었다.
내가 옹은 동년을 보냈던 단층집의 이웃인 제창병원에 대한 이야기는 어릴 적부터 들었고 아버지가 편찬한 지방지에 실린 글에서 병원 건물의 사진도 보았었다.
병원 원장 마틴이 자전거를 끌고 병원 뜨락을 막 나서려 하고 있었다. 마틴 원장이 끌고 나선 영국 노팅엄산이라는 고물 자전거는 마냥 곤색 더블 브레스트 양복을 차려입고 다니던 신사풍의 마틴 원장에 어울리게 멋졌다.
“헬로, 이사를 다 했나요?”
마틴 원장이 나를 보고 알은체하며 물었다. 아버지가 들었던 집에 다시 인테리어를 하면서 그동안 마틴 원장과 친한 사이가 된 터였다.
“네, 이른 아침에 어데 갔다 오시는지요? 그 곡괭이는 또 뭐구요?”
마틴 원장이 연속 물어 왔으나 시르죽은 기분을 주체하지 못한 채 나는 그저 서글픈 웃음만 짓고 말았다. 그러면서 되물었다.
“원장님은 어데로 가시는지요? 이른 아침에.”
마냥 혈색 좋은 얼굴에 걸맞게 명랑한 기색이던 원장의 표정도 전과는 다르게 메말라 있었다.
“이 아름다운 소도시의 풍경을 마지막으로 돌아보려고요.”
‘마지막’이라는 한정어가 내 가슴을 찔렀다.
“이제 우리는 영국으로 돌아가기로 했습니다.”
제창병원이 경영난에 시달린다는 말을 들은 바 있었지만, 정작 그들이 병원 일을 접고 돌아간다고 하니 적이 허전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한쪽은 이사 오는데, 한쪽은 떠나는군요.”
나는 밀려오는 허전함을 감추지 못하고 말했다.
마틴이 자전거의 핸들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그동안 이곳에서 여러분의 사랑을 너무 많이 받아안고 돌아갑니다. 잊지 못할 겁니다. 저 사거리 복판에 우물이 있고, 사과도 아닌, 배도 아닌 과일이 달리던 언덕 위에 과수원이 있던 이 작은 도시를요. 그리고 매일 빵이 아닌 하얀 쌀밥을 먹던 나날이며를, 지금은 여러분이…….”
마틴 원장이 들숨 한번 긋고 나서 젖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지금은 여러분이 많이 힘들 테지만 지혜롭고 근면한 여러분의 노력으로 이곳이 머지않아 다시 신의 은총을 받아안을 땅이 되리라는 것을 저는 믿습니다.”
노팅엄산 고물 자전거는 마틴을 싣고 언덕에서 미끄러지듯 길거리로 내려갔다. 자전거 위의 높이 솟은 마틴의 어깨 너머로 현성의 고풍스러움을 간직한 풍경이 활짝 펼쳐져 있었다.
“선생님.”
집으로 들어서려는 나를 누군가 불렀다.
그였다. 언덕 아래쪽 집에 사는, 꼭 눌러쓴 학생모에 교복의 윗단추까지 꼭 걸고 다니던, 단정하고 결백함의 음률이 일신에 흐르고 있는 20대의 젊은이 해환 군이었다. 이른 아침이었지만 늘 그러하듯이 그의 차림새는 추호의 빈틈도 없었다.
믿음직하고 씩씩한 기상을 지니고 있는 해환이는 인근에서 다 아는 열렬한 문학도였다. 시 편집인이었던 나인지라 흥심을 갖고 그의 모든 시를 읽었었다. 자기만의 음향과 빛깔과 그다운 체취를 갖고 있는 아름다운 시들이었다. 자신의 깨끗한 젊음을 되돌아보고 앞으로의 삶에 대한 개결(介洁)한 의지를 설파한, 심령의 부르짖음으로 가득한 그 시편들을 나는 읽고 또 읽었다.
시편마다 스며 있는 자연에 대한 사랑, 자신에 대한 성찰 그리고 그 감출 수 없는 천부에 적이 놀라 했던 나였다. 내가 문예지에서 시 편집을 한다는 것을 알고 몇 번인가 우리 집에 찾아왔던 해환이었다.
해환이 나에게 책 한 권을 내밀었다.
“하늘과 별과 바람과 시.”
등사판 책자 표지에 힘찬 글발로 적힌 제목을 나는 소리 내서 읽었다.
“졸업 기념으로 시집 한 권 내보고 싶어졌습니다.”
해환이는 볼에 홍조를 띠며 말했다.
“여태 시 공부를 억척스레 했는데 그래서 만들어 본 자선 시집입니다. 시집을 소규모 한정판으로 출간하는 것이 요즘 유행이래요. 내가 좋아하는 백석의 시집 『사슴』은 200부 한정판이었고, 서정주의 호사스럽고 유명한 시집 『화사(花蛇)집』도 겨우 100부 한정판이랍니다.”
경필로 써서 뽑아낸 책자였지만 책의 제목과 목차에 나열된 제목이 주는 신선함에 이끌려 나는 시집을 펼치고 제목들을 죽 훑어보았다.
서시, 자화상, 소년, 눈오는 지도, 돌아와 보는 밤, 병원, 새로운 길, 간판 없는 거리, 태초의 아침, 또 태초의 아침, 새벽이 올 때까지, 무서운 시간, 십자가, 바람이 불어, 슬픈 족속, 눈 감고 간다, 또 다른 고향, 길, 별헤는 밤.
“모두 열아홉 수입니다.”
조금은 흥분된 어조로 해환은 말했다. 그런 그의 맑은 동공은 사물을 움켜쥐고 있는 듯 팽팽했고 또한 불꽃처럼 형형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애초에 시집의 제목을 ‘병원’으로 정했더랬어요. 병원을 시집의 제목으로 정한 것은 요즘의 병든 현실을 치유했으면 하는 바람과 상징적 의미에서였지요."
그의 말을 들으며 나는 저도 모르게 제창병원 쪽을 돌아보았다.
“그런데 역시 문학을 좋아하는 후배가 ‘병원’이요? 시집 제목이 삭막해요! 하고 말하더군요. 그래서 지금의 제목으로 고쳐 달았어요.”
아주 잠깐 싱긋거리던 해환의 얼굴에 다시 평소처럼 진지한 표정이 어렸다.
“졸필이지만 이 시집을 시 편집을 하셨던 선생님께 선물하고 싶습니다. 다른 한 부는 저의 국어 선생님께 그리고 또 한 부는 후배에게 증정하려 합니다. 소납(笑納)해 주시면 고맙겠네요.”
“이 소중한 한정판을 나한테 주는 겁니까?”
해환이의 간절한 소망과 열정이 배인 그 자선 시집이 지닌 소중함을 나는 알 것 같았다.
“언젠가 우리 말 우리 글로 마음대로 시를 읽고 읊조릴 수 있는 그날이 온다면 그때 가서 꺼내놓고 옛말하며 소리 높이 읽어 보도록 합시다.”
해환의 음성은 조용했다. 그러나 그 조용한 음성의 밑바닥에서 지글지글 소리 내며 끓어오르는 용암 같은 의지를 나는 듣고 있었다.
“소중히 잘 읽을게요.”
나는 자신도 모르게 숙연해지며 자선 시집을 무겁게 받아안았다.
덕이가 들어 있는 부대를 멜빵 가방에 무슨 강보의 아기 업듯 들쳐업고 나는 집 뒤로 펼쳐진 언덕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 언덕 위에 덕이를 안장할 생각이었다.
하늘은 둥글게 그리고 높게 열리기 시작했다. 쪽빛 그 바탕 위로 잘게 찢어진 목화송이 같은 구름이 펼쳐져 있다. 조금 더 선명해진 햇빛은 색실이 풀리듯 올올이 선명했다.
언덕은 옆구리를 조금 틔워 오랜만에 고향을 찾아온 사람에게 길을 내주었다.
언덕을 오르노라니 아버지가 민간에서 발굴해 냈고, 어머니가 불렀던 민요가 아스라하니 떠올랐다.
“굽이굽이 감도는 해란강변에
층암절벽 기암이요 일송정이라
울뚝불뚝 북망산 공동묘지는
외국 사람 모여 사는 영국 덕이일세”
고향의 경관을 보는 듯이 그려낸 「경치가」 중의 한 구절이다.
온 식구가 모여 앉은 설 명절이면 취기에 단풍처럼 불긋불긋 색이 오른 얼굴로 아버지는 이 민요를 부르라고 어머니를 들볶았고 그 곡조에 맞춰 온 집식구가 술상의 가녘을 젓가락으로 신명 나게 두드리며 불렀던 노래였다.
「경치가」 속에 나오는 ‘영국 덕이’라는 이곳은 바로 고향의 동남쪽에 완만하게 솟아 있는 구릉지대였다. 고향 사람들은 이곳을 가리켜 영국인들이 사는 언덕, ‘영국 덕이’라고 불렀다. 이 언덕에 선교사들이 설립하여 운영하고 있는 학교, 병원 등 기관들과 그들의 주택이 있었기에 붙여진 이름이었다. 언덕 위에는 은진중학교, 명신여학교가 있었고 제창병원도 있었다.
말짱 청국인들 아니면 이주해 온 조선인들이 살 법한 곳에 영국이라니? 처음 듣는 이들에게는 어딘가 얼쑹한 지명이다. 하지만 “너희들이 영국 덕이라고 알어?” 하고 물었을 때 무릇 고향 사람이라면 모르는 법이 없다. 가령 모른다면 그는 절대 고향 사람이 아니다.
당시의 이주민들에게서 영국 덕이는 그나마 그들이 찾아 쉬고 싶고 기대고 싶은 고향의 언덕과도 같은 ‘망향의 언덕’이었다. 대부분 함경북도 방언을 구사하는 사람들이 모인 고향에서 흔히 ‘영국 떼기’라고 불리는 이곳은 이제 와서 고향을 징표하는 또 하나의 명소로 자리매김되었다. 당년에 많은 사람들이 동경하는 메카와도 같았던 ‘영국 덕이’이지만 지금 남아 있는 유적은 거의 없다. 선교사들이 살던 양관은 물론이고 제창병원이나 동산교회, 명신여학교나 은진중학교 건물들은 철저하게 파괴되어 사라져 갔다. 세월의 바람이 휩쓸고 간 자리에 남은 것이라곤 아직도 높은 이 언덕길뿐이다.
이 언덕에 대한 수많은 일화는 젊은 ‘사학자’였던 나의 아버지가 자료 더미에서 뽑아내고 고향의 산증인으로 남았던 구순의 몇몇 노인네들한테서 발굴해 냈다. 그렇게 동년의 내 눈에는 나지막했던 영국 덕이가 내 안중에 높은 산으로 보이기 시작한 것은 근년의 일이다.
이 언덕에 특별한 애정을 가져 신혼집조차도 이곳에 꾸몄던 아버지다. 아버지가 지은 애견의 이름이 어질다는 뜻의 ‘덕(德)’ 자를 따서 지은 줄 알았는데 후에 알고 보니 바로 언덕 ‘덕’이라는 뜻이었다.
그렇게 아버지가 모든 것을 바쳤던 언덕으로 내가 다시 오르려 했으나 아버지의 어제를 중복하듯이 이번에는 아내가 반대표를 들었다. 나의 아내는 ‘간도참변’이 일어났던 그 장암촌의 시골 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던 여자였다. 그러다 아내의 학교도 폐교를 맞았다. 강진이 인 후 여진이 계속되듯 학교들이 하나둘 무너져 내리는 형국이었다. 시골 학교에서 주말마다 도회지에서 내려온 나와 둘이 만나서는 옥시글 옥시글 좋아하던 재미도 끝, 아내는 그 후 나를 따라 Y시로 상경했고 분필을 들었던 손에 저울을 들었다. 토산물 슈퍼를 차리고 고향 토산물인 더덕이며, 목이(木耳)버섯이며를 넘겨다 팔았다.
“이제 겨우 시골티를 벗었는데 하필이면 다시 현성으로 돌아가요? 남 보기 쪽팔리지도 않나요? 애의 앞날을 위해서라도 죽어도 돌아 못 가요 난.”
아내는 죽어도 귀향 안 한다고 버텼다. 가족과 아이를 위해서 모든 것을 바치려고 옥생각을 했던 아내는 그 후 서울로 나가버렸다.
서울로 나가 간병인으로 일했다. 요양병원의 입원 환자 대부분이 뇌졸중이나 치매, 파킨슨병, 암환자들이거나 골절로 상한 노인이다 보니 수발드는 일이 만만치 않았다. 환자들의 침상을 정리하고 더럽혀진 기저귀를 갈아주고 양치와 세안을 해주었다. 목욕을 시키고 환자가 욕창이 생기지 않도록 정해진 시간마다 체위를 바꿔주고, 휠체어에 태워 물리 치료실에 오갔다.
간병인협회가 월말에 급여를 내주는데 쉬지도 자지도 못하며 일한 대가로 손에 쥐는 돈은 겨우 한화로 월 200만 원이었다. 그 뼈돈에서 또 간병인협회 가입비요, 회비요, 상해보험료요 하면서 떼내주었다.
그런 악조건에서도 한 몸을 혹사하며 아내는 집 한 채를 장만할 돈을 모아 나에게 부쳐 보냈다. 아내는 잡지사 편집인의 박봉으로는 엄두를 못 낼 집 마련의 꿈을 이루려 했다. Y시에 채광 좋고 엘리베이터가 장착된, 층수 높고 평수 넓은 집을 마련하려 했다.
그런데 그 뜻을 어기고 내가 귀향하련다고 하자 아내가 처음으로 나에게 고성을 질렀다.
“이젠 삭아빠진 푸성귀처럼 된 그곳으로 왜 기어이 돌아가려 해요? 그곳이 당신에게 그렇게 중요해요?”
나는 아무 말도 않고 아내의 욕을 삼태기로 먹어주다가 한마디만 내뱉고 말았다.
“중요해!”
내가 기어이 열두 살 난 딸애를 데리고 이곳으로 이사를 강행한 것은 고향에 아직도 우리 말을 가르쳐주는 학교가 몇 곳이 있는 것이 이유이기도 했다.
늘차고 좁은 언덕길이 이어졌다. 왼쪽에는 무연한 옥수수밭이, 오른쪽에는 수풀이 우거진 언덕길이었다. 밑둥까지 베어진 옥수수 그루터기가 장례식의 행렬처럼 서 있었다.
언덕 위는 어젯날 교인들의 공동묘지였다. 항간에서 사람이 죽은 뒤 화장을 하여 납골당에 보존하는 풍조가 오래된지라 고향의 산언덕에서 봉분을 찾아볼 수 있는 곳은 유독 이곳뿐이었다. 봉분이 여기저기에 버려지듯 보였다. 우묵한 봉분들은 모두가 내려앉아 보였다. 동그랗게 몸을 웅크린 오래된 봉분들은 비석도 상석도 없고 묵은 풀만 떠이고 있었다.
지질한 잡목과 잡풀이 발에 차였다. 처음에 업고 보니 덕이는 빈 벼가마니처럼 가벼웠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가팔막진 언덕길을 업고 오르려니 점점 더해지는 무게가 등짝을 압박해 왔다. 하지만 이제 덕이의 빈자리의 무게가 나의 가슴을 짓누를 것이었다.
초봄인지라 숲에 들어서니 바람이 더욱 셌다. 숲바람이 우수수 소리 내며 나를 향해 달려왔다.
느릅나무, 가문비나무, 사시나무 숲을 지나 홀로 허허롭게 서 있는 소나무 앞까지 와서 나는 걸음을 멈추었다.
덕이가 들어 있는 멜빵 가방을 소나무 아래에 내려놓았다. 그러다 장방형의 그 길쭉한 부대에 볼을 대보았다. 그러고는 규암 선생이 건네준 곡괭이를 들고 땅을 파기 시작했다.
편집부에 앉아 키보드나 두드리던 책상물림이라 땅파기가 힘들었다. 작은 강아지를 누일 땅을 한참이나 파야 했다. 땅은 아직도 채 풀리지 않은 것 같았다. 겉흙을 치우기까지는 쉬워도 정작 깊게 파려니 힘이 들었다. 잠깐 새에 뒷덜미가 흥건해졌고 이어 줄지은 땀방울이 벌건 흙 속으로 뚤렁뚤렁 떨어져 내렸다.
힘에 부쳐 신코에 흙을 잔뜩 묻힌 채 곡괭이 자루에 손을 걸치고 나는 언덕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봄은 왔건만 현성은 텅 비어 보였다. 우르르 도시로 나가고 외국으로 나가면서 고향 사람들은 대부분 밭을 중국 사람들에게 헐값으로 양도해 버렸다. 더 많이는 버려졌다. 논가에 집과 집의 노란 이영들끼리 접붙어 있던 다정한 모습은 오간 데 없고 모두가 떠나버려 주저앉았거나 주저앉으려는 집들은 괴물에 쫓겨 비워진 흉가를 방불케 했다.
동네의 문학도 청년 해환이가 건네줬던 자선 시집 속 시 한 수가 또록또록 생각이 났다.
“꿈은 눈을 떴다
그윽한 유무(幽霧)에서
노래하던 종달이
도망쳐 날아나고
지난날 봄타령하던
금잔디 밭은 아니다.
탑은 무너졌다
붉은 마음의 탑이―
손톱으로 새긴 대리석 탑이―
하루 저녁 폭풍에 여지없이도
오― 황폐의 쑥밭
눈물과 목메임이여!
꿈은 깨어졌다.
탑은 무너졌다.”
그 볼썽사나운 풍경에서 시선을 거두고 다시 땅을 파기 시작했다. 해토머리의 땅은 풀뿌리로 얽혀 있었다. 흙이 생각보다 단단했고 거치적거리는 돌멩이들도 심심찮게 나왔다. 곡괭이를 꽂고 앞뒤로 몇 번씩 흔들어야 겨우 촘촘하게 쩔은 뗏장을 한 뼘씩 벗겨낼 수 있었다.
곡괭이질 소리와 나의 단김 뿜는 헉헉대는 소리가 황량한 언덕의 정적을 깼다. 드디어 덕이를 누일 만한 ‘묘소’가 마련되었다. 구덩이는 우멍눈처럼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구덩이에 내려놓기에 앞서 부대를 꼭 그러안고 입을 맞추었다. 그러고는 하관이라도 하듯 천천히 구덩이에 부대를 내려놓았다. 벌건 황토 속에 덕이를 뉘었다.
흙을 덮었다. 흙덩이가 부실부실 떨어져 내리자 다시 울컥해졌고 목멘 소리가 터져 나왔다.
“덕이야, 잘 가!”
앙증맞게 작은 봉분이 생겨났다. 얼핏 보면 그냥 흙더미로 보일, 하지만 봉분을 곡괭이 등으로 두드리고 공글러 정성스럽게 작은 ‘유택’을 만들었다.
이윽고 곡괭이를 던지며 탈진한 듯 나는 봉분 앞에 주저앉았다. 부스럭거리며 멜빵 가방에서 고량주 한 병과 북어를 끄집어냈다. 엊저녁부터 경황없었던지라 때도 걸렀던 나는 허겁지겁 빈 속에 매운 고량주를 부어 넣었다. 잔을 챙겨 올 경황도 없어 병을 들어 단김 나는 입속에 부어 넣었다. 북어를 찢어 걸탐스레 씹어 댔다. 한 토막은 봉분 앞에 놓아주었다.
산속 어딘가에서 이름 모를 새가 울음을 토하고 있었다. 새 울음소리가 저리도 애달프고 청명하고 요란하다. 너무나 애달파 괴이쩍게 들리기까지 했다. 새의 투명한 고음에 귀를 기울이던 나는 홀연 어떤 노래가 생각났다. 손바닥으로 이리저리 눈언저리를 훔쳐내고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핸드폰에 저장해 두었던 영상을 풀었다. 어머니가 나왔다.
어머니는 좋은 조건도 뿌리치고 상경을 거부하며 기어이 고향에 남아 버린 아버지를 미워하는 듯했다. 그저 주말이나 설 명절이면 고향으로 내려가 막김치를 담가 주고 옷도 빨아 주었다. 그러고는 서둘러 집을 빠져나오곤 했다. 다시 상경하는 버스에서 어머니는 저도 모르게 노래를 흥얼거렸다.
그렇게 졸혼을 하기라도 한 늙수그레한 부부처럼 두 사람은 서로의 인연에 응수하듯 그럭저럭 만년을 지냈다. 노래 교실을 만들고 인근 아줌마들과 매일 같은 노래를 신들리게 부르고 불렀던 어머니는 뇌일혈로 노래 교실 교탁 위에 쓰러져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말았다. 지금은 사라지고 볼 수 없는 비디오로 민요를 연구하는 음대의 교원들이 찍은 영상을 다시 핸드폰에 옮겨 간직한 모습, 영상 속의 어머니는 40대로 Y시에 오기 전, 많이도 젊은 모습이었다. 현성의 옷집에서 맞추어 입은, 지금보다는 너무나도 촌티가 확연한 치마저고리를 입고 있었지만 목소리는 이미 민요 가수로서의 완숙함으로 절어 있었다.
"어제 오늘 성튼 몸이
북망산이 웬 말이오
아이공 상사디여 상사디여 상사디여
초록 같은 우리 인생
장생불사를 어이하리
새빠지게 일만 하다
그냥 가니 너무 섧네
아이공 상사디여 상사디여 상사디여
가도 가도 끝도 없네
한이 없네 인생살이
너도 가고 나도 가고
저승에서 반기세나
아이공 상사디여 상사디여 상사디여"
아버지가 발굴해 내고 어머니가 부른, 이곳에서 백 년 전에 부르던 「상여가」였다. 「상여가」는 오래된 김치처럼 삭아 있었다. 느지럭 느지럭한 소리가 달팽이 기어가듯 하면서 나오다가 후렴구에 가서는 소(沼)를 만난 폭포처럼 빨라진다. 시름 한숨과 설움이 한 움큼 담긴 어머니의 「상여가」를 듣노라니 다시 울컥해져 나는 작은 봉분 앞에 눈물을 떨구고 말았다.
숲 바람이 우수수 몰려왔고 오싹하며 나는 그만 잠에서 깨고 말았다. 그렇게 나의 “꿈은 눈을 떴다. 그윽한 유무(幽霧)에서.”
고향에 이사 오던 첫날 애견이 로드킬을 당했고 곁집에서 곡괭이를 빌려 언덕에 묻고는 감개에 사로잡혀 고량주 한잔 기울였던 나는 엄습해 오는 피로에 까무룩 졸았던 것이었다.
아직도 꿈의 연장선에 사로잡혀 꿈이런듯 생시런듯 나는 언덕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고향의 산야는 수묵화 같다.
은근히 피어오르는 봄의 아지랑이 속에 산의 능선과 능선들이 겹겹이 아스라하고 그 산자락 아래 얕게 고여 있는 강은 극도로 붓을 아낀 산수화처럼 단아하고 고즈넉했다.
봄이다. 메마른 산야는 사처에서 회생의 기미를 보인다.
몽매(夢寐)에서 채 헤어나오지 못한 듯, 나는 고향의 언덕 위에 그렇게 점도록 앉아 버렸다... ...
각주-
1) 중국의 영구보존 기록물을 관리하는 기구.
2) 예술단에 대한 연변의 부름말.
용정 영국더기 위에 선 필자
디아스포라 웹진 '너머' 2024년 제8호
조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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